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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ul 06. 2022

미세 공격은 쁘띠 행복으로 지우지 뭐

차오르는 화를 희석하는 법


    

일요일 오후. 별다른 일이 없다면 집에서 점심을 먹고 나와 집 근처 카페에서 책을 읽는 시간은 일주일 중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다. 간섭하는 사람도, 해야 할 의무와 책임도 없는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이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 놓고 도서관에서 잔뜩 빌려 놓고 펼쳐 보지 못해 반납 기한이 임박한 책을 읽는 중이었다.    

  

저... 혹시...     


평화의 시간을 깬 건 낯선 사람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니 화려한 하와이안 셔츠에 새하얀 바지, 명품 로고가 빛나지만 묘하게 낡은 흰 가죽 로퍼를 신은 풍채 좋은 60대 후반의 어르신이었다. 사실, 내가 카페에 들어올 때부터 저 사람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걸걸한 목소리로 언급한 단어는 #땅, #투자, #소유권, #전현직 대통령 이름, #대출 등등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만 들어도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짐작이 갔다. 그래서 그와 최대한 멀리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도 내 영역을 넘어온 이유는 뭘까 궁금해 물음표를 가득 얼굴에 품고 응대했다.     


네? 무슨...?

저 혹시 볼펜 좀 빌릴 수 있을까요?  

하와이에서 전화가 왔는데 뭘 좀 적을 게 있어서...     


볼펜? 하와이 주지사에게라도 전화가 온 걸까? 궁금함을 머릿속에 돌돌 굴리며 들고 온 에코백을 뒤졌지만, 없다. 사실 상대방에게 보여줄 액션일 뿐이었다. 오늘은 평소 가지고 다니던 파우치를 가져오지 않았다. 그 안에는 경기도민의 필수품, 고용량 보조 배터리를 비롯해 펜과 메모지 등 잡다한 물건이 들어 있다. 하지만 집 근처라 가방에 책 두 권과 지갑, 이어폰만 넣어 쭐레쭐레 카페까지 걸어왔다.      


아이코... 볼펜이 없네요.     


정중하게 응대하고 대화를 끝맺으려는 나에게 돌아온 ‘하와이 노신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을 깼다. 그것도 와장창.     


아니 왜 볼펜도 안 가져지고 다녀요?     


으잉? 이게 무슨 개뼉다귀로 저글링 하는 소리인가? 남자는 걸걸한 목소리로 화를 내고 있었다. 본인도 볼펜이 없어서 빌리러 다니면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볼펜 안 가지고 다닌다고 타박하다니... 어이없었다. 뭐 이런 무례한 인간이 있나 싶어서 다다다 송곳 같은 말로 쏴 주고 싶은 마음이 한 바가지였지만 평화로운 일요일 오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직 내공이 약해 이너 피스가 살짝 흔들릴 뻔하긴 했지만 이따위 미세 공격쯤에 무너질 내가 아니다. 조용히 레이저 눈빛을 짧게 쏴 주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참 책에 빠져 읽다 목이 뻐근해 고개를 들었다. 굳은 목을 스트레칭하다 보니 그 무례한 하와이 신사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아마도 카운터에서 빌려왔음 직한 볼펜으로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얼마 후 위아래로 새하얀 골프 웨어를 차려입은 다른 일행이 와서 사라지기 전까지 열정적으로 전화를 받으며 메모했다. 카페가 울릴 정도로 얼큰한 목소리로 재력을 과시했고, 자신이 계획하는 원대한 사업에 관해 설명했다. 이어폰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발명하신 이름 모를 분께 마음으로 108배를 했다. 덕분에 예전처럼 작은 일에도 화가 나서 불타오르지 않을 수 있게 됐으니까. 잠자고 있던 내면의 소악마를 깨우지 않아도 되니까.      


우리는 매일 마음에 생활 기스를 만드는 미세 공격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공공장소의 익룡들, 길거리 워킹 흡연족, 캄캄한 극장에서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인간 반딧불이, 3보 1침을 내뱉는 걸어 다니는 히드라, 가깝다는 이유로 아무렇지도 않게 선을 넘는 사람들, 타인의 자존감을 갉아먹는 막말러, 호의가 권리인 줄 아는 갑질러, 책임지지도 못할 개똥 같은 말만 배설하고 튀는 악플러, 끝을 모르고 치솟는 물가, 뒷목 잡게 하는 뉴스 등등 이런 일상 속 미세 공격 역시 미세먼지처럼 작지만 쌓이면 몸에 해롭다. 그러니 미세 공격에 걸맞은 사이즈의 쁘띠 행복으로 희석할 수 있다.     


열받아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와 심장에는 산미 없이 고소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유해 주고, 초여름에만 잠깐 나오는 초당 옥수수를 뜯어먹으며 선풍기에 머리를 말린다. 아직 열기가 식지 않은 산책로를 밤바람 맞으며 걷는 일, 요가를 마치고 갓 뽑은 가래떡처럼 말랑해진 몸을 이끌고 얼른 집에 가서 샤워하고 싶어 발걸음이 빨라지는 일, 아침 일찍 산에 갔다가 빵집에서 갓 나온 소금빵과 단팥빵을 품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 같은 일상 속 작은 행복 말이다.      


에너지를 빼앗는 일에 신경 끄기. 요즘 내가 제일 집중하고 있는 일이다. 대신 내가 좋아하는 것, 나를 채워주는 것, 나를 단단하게 하는 훈련, 나를 바로 서게 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아무리 들이부어도 온갖 틈으로 에너지가 줄줄 새는 비효율의 인간이 하나 둘 구멍을 메워가고 있다. 메워야 할 구멍은 여전히 넘치지만, 하나하나 채우다 보면 언젠가 끝이 날 테니 오늘도 나만의 쁘띠 행복을 찾아 부지런을 떨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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