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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ug 03. 2022

지금은 제자리걸음처럼 보여도

글태기 시즌에 대처하는 자세


한겨울에 태어나서일까? 1년 중 가장 견디기 힘든 계절이 여름이다. 찜통에 들어앉아 푹 쪄진 만두 같은 상태다. 그래서 그런가? 기운도 없고, 머리도 안 돌아간다. 글 쓰기 싫다. 쓸 거리도 없고, 딱히 하고 싶은 이야기도 없다. 그런데도 기계처럼 쓴다. 자판기처럼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두 번은 무조건 글을 토해낸다. 먼저 도착한 청구서를 받은 사람처럼 일요일 저녁부터 다음 날 브런치에 올릴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몸서리친다. 월요일이 되면 꾸역꾸역 노트북 앞에 앉아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린다. 겨우 월요일의 미션을 클리어하고 나면 다시 화요일부터 수요일에 올릴 글을 뭐 써야 할까? 머릿속을 뱅뱅 굴린다.      


글태기 시즌이 된 후 그 전과 가장 달라진 점은 부팅 시간이 길어졌다는 점이다. 계획형 인간이라 정해진 시간이 되면 무거운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지만, 글이 완성되기까지는 다른 계절과 비교해 오랜 시간이 걸린다. 100도가 되어야 비로소 끓는 물처럼 미지근한 머릿속의 단어들을 굴려봐도 글이 되진 않는다. 99도의 글감들은 대부분 휘발되고, 100도에 닿은 글감만 비로소 한 편의 글이 된다. 그러기 위해 글감을 모아둔 창고 같은 스마트폰 메모장이나 사진첩을 뒤적이고 카톡의 채팅방들을 훑으며 오늘의 이야기 주제를 찾아 헤맨다. 마치 캄캄한 굴속에서 반짝이는 금맥을 찾는 광부처럼 부지런히 찾는다.      


물론 일정 횟수 이상 글을 쓰지 않으면 브런치에서 쫓겨나는 것도 아니고, 악마에게 영혼이 팔려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세운 철칙일 뿐인데도 악착같이 지키려고 노력한다. 퀄리티는 나중 문제다. 횟수 채우기에 급급하다. 누군가의 눈에는 무슨 뜬구름 잡는 허튼소린가 싶은 얘기도 무식하게 쓰고 본다. 발행 버튼을 누르기 전에도 이따위 걸 올려도 되나 수십 번 고민하고, 발행 버튼을 누르고도 수없이 고친다. 아무리 손을 봐도 100% 마음에 들 리 없지만 완성도 부분에서는 눈을 딱 감는다. 대신 오늘도 ‘하기 싫은 마음’에 지지 않고 일단 ‘해낸’ 내 엉덩이를 토닥여 준다.      


최근의 술자리에서 황소윤이 내게 물었다. 창작자에게 특히 필요한 자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냐고. 나는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를 견디면서 계속하는 힘이라고 대답했다. 언제나 맘에 쏙 드는 것만을 내놓는 창작자도 어딘가엔 있겠지만 나는 그런 창작자가 아니다. 지나친 엄격함에 짓눌리지 않도록 주의하곤 한다. 반복하면 더 잘하게 된다고 격려하며 자신을 너그럽게 다룬다. (중략) 우리는 아마도 이 짓을 오래 할 것이다. 오래 하는 동안 어떤 식으로든 달라질 것이다.   

이슬아 인터뷰집 <창작과 농담> 중   

  

인지도도 영향력도 스타일도 <창작과 농담> 속 반짝이는 젊은 아티스트들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 밑줄을 그을 수 없으니 마음으로 형광펜을 그었다. 그 페이지를 사진으로 찍어 두고 문장을 곱씹고 있다. 게으름, 무기력, 불안이 뒤섞인 검은 그림자가 덮칠 때마다 바닥에 납작 엎드리다 못해 땅으로 스며들고 싶지만 '오래 하는 동안 어떤 식으로든 달라질 것이다'라는 이 문장이 멱살을 잡고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나를 일으킨다.      


언젠가 엄마가 틀어둔 TV 건강정보 프로그램에서 집에서도 간단히 확인할 수 있는 <골반 틀어짐 자가진단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50번 제자리걸음을 해 보면 골반이 틀어진 방향으로 몸이 움직인다고 했다. 전문가의 지도에 따라 테스트를 해 본 출연자들은 분명 본인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50걸음 후 눈을 뜬 현실은 처음 그 자리를 벗어나 새로운 곳에 몸이 서 있었다.      


지금 쓰는 이 글도 분명 제자리걸음일 거다. 고만고만한 소재, 그저 그런 표현, 예측 가능한 구성, 새롭지 않은 메시지까지. 하지만 나는 안다. 제자리걸음 같은 시간이 쌓이면 나도 예상 못한 곳으로 나를 데려가 줄 거라는 걸. 당장은 그저 그래 보여도 오늘의 한 걸음이 있어야, 변화가 시작되고 오래 하다 보면 어떤 결과든 결과를 품에 안을 수 있다. 시작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결과도 내게 저절로 오는 건 없으니 오늘도 일단 쓰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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