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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ug 22. 2022

듣기‘를’ 좋아하지만 듣기‘만’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내가 말이 없어지는 이유는 바로 너


    

어느 모임을 가든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존재한다. 대화의 총량을 100이라고 치면 70% 이상을 차지하는 사람들. 모인 사람이 몇 명이든, 모임의 주제가 뭐든 마이크를 쥐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말이다. 어쩌다 이야기의 주도권을 빼앗기면 금세 흥미를 잃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술이나 차를 홀짝 홀짝인다. 그마저도 그냥 흘려버리는 시간이 아니다. 자신이 대화의 주인공이 될 타이밍을 잡기 위해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숨을 고르는 시간이다. 간간이 영혼 없는 리액션을 던지고, 술과 안주를 먹고 마시며 바닥난 에너지 충전한다. 그러다 현재의 주인공이 잠시 호흡을 고르는 그 순간을 노려 말할 타이밍을 낚아챈다. 깜빡이도 켜지 않고 말과 말 사이 미세한 정적을 비집고 들어가 하고 싶은 말은 하고야 만다.      


그런데 상대의 끊고 시작할 만큼 그의 이야기는 중요했나?  기준에는 딱히 그럴 만큼 대단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국제 정세를 논하는 국제회의도 아니고,  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국무 회의도 아닌 그저 시답잖은 일상 얘기를 하며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날이니까. 하지만 이야기의 주도권을 1인에 의해 독점한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귀가 얼얼하고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대화는 일찌감치 끝났지만, 귓가에는 환청이 들린다. 편향적인 대화의 찌꺼기들이 달팽이관에 여전히 달라붙어 있다.         


음악, 미술, 체육처럼 말하기 또한 재능이 필요한 일이다. 여러 사람의 시선이 모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한 번 뱉으면 주워 담기 힘든 말의 속성 때문에 프로 청자(聽者)들은 쉽게 툭 내뱉지 않는다. 그래서 1/N로 나눠 말을 해야 하는 순간이 아니라면 귀를 활짝 열고 듣는 편이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의 박수를 치고, 짧은 응원과 위로를 전한다. 프로 청자들이 자의 반 타의 반 양보(?)한 대화의 지분을 수다러들은 재빨리 채간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가득 담아 이 말을 남기며...       


너는 참 말이 없구나?

말하기보다는 듣는 쪽에 재능이 있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듣기만 하고 싶은 사람은 세상에 없다. 내가 13분 47초 들어줬으니 너도 13분 47초 들어줘 까지는 아니지만, 상대가 5번쯤 이야기를 하면 나도 1~2번쯤은 내 이야기를 들어주길 기대한다. 승패를 가릴 경기가 아닌 공을 주고받는 탁구 랠리처럼 이야기를 주고받고 싶지만 그런 쿵작이 맞는 대화를 할 사람을 만나기란 갈수록 어려운 시대다.

     

입을 열지 않으면 존재감마저 사라지는 토크 전쟁터. 그곳에서 간신히 내 이야기를 할 타이밍을 어렵게 잡아도 달변이 아닌 사람이 입을 열면 주위가 쉽게 흐트러진다. 모자란 술과 안주를 주문하기도 하고, 눕혀뒀던 휴대폰을 다시 잡기도 한다. 일순간 식은 토크 열기를 살갗으로 느끼는 순간 프로 청자는 ‘그치 뭐... 내 이야기가 뭐 대단한 거라고...’라는 자기 검열의 늪에 빠지고 만다. 100을 얘기하고 싶지만 시간 관계상 80 정도만 하자라고 시작해 놓고도 싸한 분위기에 23쯤 지점에서 급히 마무리한다. 프로 청자의 토크 타임이 마무리되어간다는 신호가 감지되자 수다러들은 쥐었던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입을 연다.      


얘는 참 말이 없어. 안 그래? 그래서 내가 저번에 블라블라블라     


말하기를 잘하기 위해서는 우선 잘 들어야 한다. 이름난 달변가들이 공통으로 꼽은 <말 잘하기의 제1원칙>이다. 듣는 사람은 없고 말하는 사람만 있는 대화는 원치 않는 일방적 강연이다. 피가 되고 살이 될 삶의 지혜라도 있으면 다행이지만 자기 과시나, 자학, 뒷담화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화는 허무하기 그지없다. 듣기를 좋아하지만 한 사람이 듣기만 하는 대화는 양쪽 모두에게 시간 낭비일 뿐이다. 그래서 듣는 법을 모르는 사람과의 만남이 갈수록 꺼려진다. 인간에게 귀가 두 개, 입이 하나인 이유는 말하기보다 듣기의 중요성을 깨달으라는 조물주의 뜻일지 모른다. 입만 있고 귀가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난 듣기‘를’ 좋아하지만 듣기‘만’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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