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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Sep 05. 2022

방패인 줄 알았는데 칼이었던 말

“제가 잘 몰라서... “라는 말로 잃은 것과 얻은 것

     

   없는 새로운 일을 제안받거나, 시도해  것을 권유받을 때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정해져 있다.      


제가 잘 몰라서...

새로운 시작이 어려운 사람이 종종 사용하는 ’ 싫다 ‘의 완곡한 표현이다. 작지도 않은 몸뚱이를 숨기기에 이 보다 좋은 말이 없었다. 지구 최강의 금속, 비브라늄 100%로 만든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처럼 단단한 그 말 뒤에 몸을 숨기기 바빴다. 쥐뿔도 모르는데 괜히 나서서 서로 민망한 상황을 겪는 것보다 능력이 없다면 일찌감치 사양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는 허울 좋은 변명이다. 솔직히 말하면 내 능력 부족을 들키기 전에 적당히 숨기며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는 게 중요했다.      


내가 방패로 삼았던 그 말을 칼로 사용하는 사람을 봤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그 순간 따귀를 맞은 듯 볼이 얼얼했고 귀 끝이 불타오를 뜻 시뻘게졌다. 잘 몰라서 물러서는 나와 달리 그 사람은 잘 모르기 때문에 해보겠다고 성큼 다가섰다. 잘 모르기 때문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잘 모르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고, 잘 모르기 때문에 조금만 잘해도 큰 칭찬이 따라왔다. ’잘 몰라서’라는 말을 칼처럼 휘두르며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진격하는 사람에게 쥐어지는 결과는 내가 상상한 그 이상이었다.      


처음이 없으면 다음은 없다. 처음의 어색함, 뚝딱거림, 좌충우돌, 우당탕탕을 겪지 않고 능숙한 숙련자가 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순간의 불편한 감정을 견디지 못한 나는 ‘잘 몰라서’라는 말로 결계를 치고 수없이 많은 기회를 스스로 내치곤 했다. 매번 방패 뒤에 숨은 내가 자초한 결과다. 원망할 사람조차 없는 내가 스스로 판 무덤이었다.     


선배, 이번에 제가 친구들이랑 모임 하나를 만들려고 하는데...

같이 가보실래요?     


절친한 후배의 제안이었다. 초등학교 동창 4명이 자신의 지인들을 한 명씩 영입해 총 8명이 돌아가면서 자기가 아는 무언가를 가르쳐 주는 모임, 이름하여 <초보에게 초보가>가 탄생할 기회였다. 본인도 한참 알아가는 중인 초보지만 더 생초보인 누군가에게 자신의 재미와 즐거움을 알려주고 나누자는 취지의 모임이다. 쉽게 말해 가만히 앉아 있으면 꿀처럼 달달한 정보들을 떠먹여주는 모임이다. 부동산 재테크가 취미인 컴퓨터 프로그래머, 자동차 마니아인 타이어 회사 연구원, 아마추어 뮤지컬 배우인 대기업 회사원을 비롯해 나 같은 생각 많은 프리랜서까지...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에서라면 접점이 없었을 사람들이 모였다. 그곳에서 부동산 경매 노하우며 최소의 비용으로 드림카 사는 법, 아마추어 뮤지컬 배우의 세계, 이율 좋은 적금 정보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분야에 눈을 뜰 수 있게 됐다. 마치 정보의 밀키트같나고나 할까? 처음부터 내가 공부했다면 수없이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을 정보와 기회들을 정제되고 다듬어진 상태로 전달받는다. 나는 그저 내  방식으로 조리해 먹으면 된다. 냠냠. (나 역시 그 친구들에게 글쓰기 팁과 책 출간의 경험을 나눠줬다.)      


처음 후배가 제안했을 때, 마음은 반반이었다. 모르는 낯선 사람이 가득한 그곳에 선뜻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인사가 오가고 수많은 사람 사이에 외딴섬처럼 외로이 둥둥 떠 있어야 하는 그곳에 숨 쉬고 있는 나를 상상하니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 ‘제가 잘 몰라서 ‘를 칼처럼 휘두른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색함은 순간이고, 즐거움은 길 테니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내가 잘 모르지만 가보자!

모르니까 해보고 싶어!

일단 해보지 뭐!      


어색했던 첫 만남 이후 2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종종 만나 서로에게 도움이 될 정보와 기회들을 주고받는다. 틀에서 찍어낸 붕어빵처럼 똑같은 일상을 살다 보면 가끔씩 <초보초> 친구들이 똑! 똑! 문을 두드린다. 카톡으로 대화를 하고, 오프라인으로 만나 서로 자극을 주고 영감을 받는다. 단단한 얼음 안에 갇혀 있는 잠자고 있는 냉동인간 같은 나를 일깨워준다. 얼마 전 이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 이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얼마나 편협한 사람이었을까? 생각했다. 물론 이 친구들과의 만남으로 인생이 호떡 뒤집히듯 드라마틱하게 역전된 건 아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안락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좋은 곳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부지런히 움직이는 친구들을 보면서 여기저기가 근질근질해진다. 뭔가 하고 싶어 손이 근질거리고, 한 없이 무겁기만 했던 엉덩이가 들썩들썩한다. 그래 그렇게 한 발짝 한 발짝 움직이다 보면 내가 원하는 무언가에 닿아 있을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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