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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Dec 19. 2022

무른 연필, 무른 마음

무른 마음이 나를 망칠 때  


초등학교 시절, 처음 4B 연필을 쥐었던 날의 충격은 여전히 생생하다. 분명 겉모양은 평소 쓰는 연필이랑 똑같은데 HB 연필과 차원이 달랐다. HB 연필이 뻑뻑하고 날카로운 느낌이라면 4B는 진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강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악필에 가까운 글씨라 자신이 쓴 글씨를 보는 게 괴로운 어린이였던 난 단번에 4B연필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진하고 선명한 글씨가 써지니 미술 시간에나 등판해야 할 4B연필을 일반 필기용으로 사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4B연필의 본색을 깨닫게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열심히 숙제했을 뿐인데 숙제를 끝내고 나니 손날이 시꺼멓게 변했다. 당시, 4B연필과 사랑에 빠진 어린이의 머리는 단순했다. ‘오늘 이상하네 ‘라고만 생각했지, 그 원인이 4B연필 때문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숙제를 다 했다는 기쁨에 얼른 덮어 버린 숙제장. 다음날, 숙제 확인을 하던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분명 깔끔하게 썼던 숙제장은 잿가루라도 뿌려 놓은 듯 엉망이었다. 열심히 한 숙제는 낙서한 것처럼 난장판이었다. 무른 연필심이 번져 글씨와 종이를 분간하지 못할 만큼 뒤섞어 버린 탓이었다. 안타깝게도 우리 담임 선생님은 내 사정을 봐줄 인정 많은 분은 아니었다. 숙제장에 장난을 쳤다고 크게 혼났다. 억울했다. 난 열심히 숙제했을 뿐인데... 잘못한 건 내가 아니라 무른 4B연필이었는데... 이미 물은 엎어졌고, 이 사태의 원흉 4B연필은 쳐다보기도 싫었다. 사랑에 마지않던 4B연필을 필통 구석에 쳐 박아 버렸다. 그렇게 내 사랑 4B연필은 미술 시간을 제외하고 필통 밖 외출 금지령을 받았다.     


무른 연필 때문에 공책을 엉망으로 만들고, 손을 더럽히던 어린이는 자라 무른 마음 때문에 자신을 망가뜨리는 어른이 됐다. 난 분명 열심히 했는데 돌아보면 결과는 엉망이었다. 내 의도와 다른 결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의 ’ 열심’은 수포가 되기 일쑤였다. 열심에 취해 결과를 낙관했고, 기대 밖의 결과가 쥐어졌을 때 어김없이 무릎이 꺾였다. 한동안 제대로 서지 못하고 휘청이면서 허우적거렸다. 내 기질은 두드리면 단단해지는 쇠가 아니라 두드리면 부서지고 깨지는 유리였다. 그 어떤 접착제로도 다시 붙이기 어려운 유리에 가까웠다. 회복하는데 오랜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했다. 겨우겨우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고 해도,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은 솥뚜껑만 봐도 몸서리쳤다. 실패의 트라우마는 시도를 어렵게 만들었고, 겨우 시도한다 해도 늘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만 돌아왔다.      


무르디 무른 마음은 결국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았다. 그제야 내 무른 마음을 다시 보게 됐다. 좀 손해를 보더라도 마음 편한 쪽을 택했던 나, 내가 듣기 싫으니 남에게도 쓴소리를 하지 않았던 나, 내 몸이 좀 피곤 해도 남들이 좋아하면 그게 더 좋았던 나. 그런 물러 터진 마음들은 내 안에서 누가 시키지도 않은 억울함을 만들고, 엇나갔다. 내가 좋아서 한 선택의 결과에 제대로 뒤통수 맞았다. 무른 4B연필 때문에 번져 버린 숙제장처럼 엉망이 된 나를 정리할 타이밍이었다.

     

몸도 마음도 단단해질 필요가 있었다. 선을 그었다. 줄 때 주더라도, 손해 볼 때 보더라도 억울한 마음이 1g이라도 느껴지면 멈췄다. 아니면 아니라고 말했다. 뒤에 가서 후회하며 머리를 쥐어뜯느니 일단,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버렸다. 예전이었다면 정 없다고 느껴질 행동들을 하나하나 실행했다. 처음은 불편하고 어색했지만, 눈을 질끈 감았다. 한 번은 어려웠지만, 다음은 조금 쉬웠다. 그다음은 편안했다. 순간의 불편함을 참으면 나의 안락함은 오래 지속됐다. 싫은 건 싫다고, 하기 싫은 일을 참아가면서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낀 몸과 마음의 에너지는 오롯이 나를 위해 썼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 아낌없이 누리며 다시 에너지를 충전했다. 드디어 옳게 변했다.      


무른 4B 연필심 때문에 뭉개진 글씨와 엉망진창이 된 공책을 원상복귀시켜 보려 가지고 있는 지우개를 총출동시켰다. 손에 쥐가 나도록 지우개로 지우고 또 지웠지만 망가진 공책을 되돌리기란 불가능했다. 애초에 번지지 않는 단단한 연필로 썼다면 들이지 않을 수고였다. 무른 연필이 손을 더럽히고, 공책을 망치듯 무른 마음은 내 일상을 망가뜨리고, 내 몸과 마음을 해친다. 강철보다 더 단단한 세상을 무른 마음으로 부딪혀 봤자 뭉개지는 건 나다. 감자 샐러드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뭉개지고 으깨져야 할 필요가 없다. 휘청이고 으스러질 거 같은 마음이 들 때는 4B연필로 엉망이 된 숙제장을 떠올린다. 내 삶이 엉망진창 숙제장이 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으니 단단히 마음을 다잡는다. HB 연필처럼 적당히 단단하면서도 적당히 검은 연필 같은 내가 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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