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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an 30. 2023

신묘한 퇴근의 힘

미용실 마감 시간에 가면

양치를 하다가 문득 거울을 보니 뿌리 염색이 필요하다고 머리카락이 울부짖고 있었다. 염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거 같은데 벌써 염색을 해야 할 때가 왔다. 칫솔을 입에 문 채 얼른 핸드폰을 켜서 단골 미용실 예약 창을 열었다. 다음 주엔 일정이 있으니 이번 주 안에 사람 꼴을 만들어야 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주말뿐이다. 일요일은 미용실 휴무니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날은 토요일. 뿌리 염색을 해야겠다 결심한 날이 수요일인데도 이미 토요일 예약은 꽉 찬 상태였다. 그나마 마감 전 마지막 예약 가능 시간인 6시 30분만 가능했다. 일단 예약 버튼을 누르고 요청 사항란에 구구절절 이유를 썼다.     


“역시 인기 선생님! 염색 예약 마감 시간이 5시 30분까지 인 걸 알지만 예약 가능한 시간이 이 시간뿐이라 부득이하게 예약합니다. 시술 불가면 취소해 주시고, 조금 일찍 가도 되니까 가능한 시간 있다면 알려주세요.”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오랜 단골인 나의 요청을 내팽개 칠 수 없었는지 다음날 오전 일찌감치 미용실에서 전화가 왔다. 뿌리 염색만 하면 6시까지 오시면 시술이 가능하다고. 예약을 확정한 후 토요일 저녁 6시 미용실로 향했다. 늘 반짝이는 얼굴로 인사하던 담당 선생님과 어시스트 분이 피곤에 찌든 얼굴로 날 맞아줬다. 지난 설 연휴 동안 밀렸던 예약을 소화하느라 의자에 한 번 편히 안을 수 없을 만큼 바쁘게 오늘 하루를 보냈다고 했다. 마지막 손님인 나를 끝으로 길고 길었던 오늘 하루를 마감한다며 최후의 미소를 힘겹게 쥐어 짜내는 게 느껴졌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무리해서 짐을 얹은 거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평소 시술 전 느긋하게 수다를 떨던 분위기와 달랐다. 속전속결, 미리 준비해 둔 염색약을 빠르게 바르고 각자의 할 일에 몰두했다. 어시스트는 청소를 시작했고, 오너인 담당 선생님은 설 선물로 받은 좋은 차가 있다며 내게 차 한잔을 가져다주고 정산에 몰두했다. 준비해 간 책을 읽으며 염색약이 빨리 스며들기 바랐다. 그들의 소중한 퇴근 시간을 침범하고 싶지 않으니까.      


시간이 지나 샴푸를 하러 갔을 때였다. 무릎에 덮어 주는 담요, 물 온도와 목 상태가 편한지 묻는 질문 등등 모든 게 평소와 같았지만 단 하나, 그게 없었다. 바로, 클리닉 권유. 새치 염색을 시작한 후 머릿결이 급속도로 상했다. 주기적으로 화학 약품이 닿으니 상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집에서 좋다는 헤어트리트먼트나 팩을 해도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러니 뻣뻣한 머리를 만지던 담당 선생님은 당연스레 스페셜 케어를 권했고, 시간과 돈이 허락하는 한 오케이를 하는 편이었다. 큰돈 들이지 않고, 머리에 영양도 주고 또 관리받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항상 영양 케어를 받으니까 당연히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별도의 얘기도 영양 시술도 없었다. 샴푸를 하는 내내 궁금했다. 샴푸를 마친 후 의아함을 가득 품은 채 자리에 앉았다. 염색이 끝난 후 머리를 말리면서 담당 디자이너는 말했다.      


“다음에는 꼭 영양 받으셔야겠어요.”     


깜빡 잊은 게 아니라 자발적 스킵이었다. 공식적인 미용실 영업 마감 시간은 8시. 모든 시술이 8시 안에만 끝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 영양 관리를 패스할 만큼 퇴근은 중요했다. 퇴근이 이렇게 무섭다. 나도 출근을 할 때부터 퇴근을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퇴근하기 위해 출근한다. 하루는 퇴근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하루를 쉴 틈 없이 달려온 사람이라면 응당 보장받아야 하는 시간인 퇴근.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당당히 퇴근하기 위해서는 일하는 동안 몰입해야 한다. 잡다한 딴생각이나 잡일로 시간을 때우는 게 아니라 선택과 집중을 통해 효율을 높여야 정시 퇴근이 가능하다. 시간이 되면 어쨌든 퇴근은 하겠지만 찝찝함 없이, 떳떳한 마음을 가지고 퇴근하고 싶다면 불필요한 딴짓은 금물이다.       


미용실의 기둥을 하나 세울 만큼 큰돈을 벌어다 주는 시술이 아니기에 미용실 스태프들은 10분 빠른 퇴근을 선택한 거다. 거절에 취약한 나는 영양 클리닉 권유를 받을 때마다 오케이 하지만, 어쩌다 거절할 상황일 때는 마음이 무겁다. 그게 으레 하는 말이고, 영업의 일종인 걸 알지만 5년 넘게 얼굴을 보고 지내는 사이의 권유를 쉽게 거절하긴 쉽지 않다. 그런데 마감 시간에 오니 거절할 일이 없어서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미용실을 나오는 나의 머릿결은 좀 뻣뻣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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