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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an 27. 2023

루틴이 있어 무해한 날들

생각 많은 사람이 생각을 없애는 방법

새벽 5시 알람이 울리면 눈을 뜬다. 비몽사몽 상태로 불을 켜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는 사이 빠르게 욕실로 향한다. 씻고 나와 물 한 잔을 마신 후 화장품을 바른다. 화장품이 피부에 스며들기를 기다리며 머리를 말린다. 물기가 사라지면, 간단하게 옷을 챙겨 입고 나와 밥을 차린다. 상을 차리며 도시락도 싼다. 밥을 먹고, 이를 닦은 후 겉옷을 챙겨 입는다. 현관으로 나가기 전, 텀블러와 고단백 두유를 챙겨 가방에 넣는 시간은 6시. 10여 분을 걸어 전철역에 도착하면 6시 16분 차를 느긋하게 탈 수 있다. 뒤통수에 생긴 까치집도 정리하지 못할 만큼 분주하게 새벽길을 나서는 사람들 사이에 나도 있다. 1번의 환승을 거치고, 내려야 할 전철역에 도착하면 6시 55분. 긴 통로를 지나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며 별다방 사이렌 오더를 누른다. 이제 막 영업 준비로 분주한 별다방 주문대에 닉네임과 함께 텀블러를 건네면 3분도 지나지 않아 커피가 나온다. 커피가 혀를 데지 않고 먹기 좋을 만큼 식기를 잠시 기다리며 멍을 때린다. 어느 정도 머리가 부팅되면 책을 읽기도 하고, 이렇게 글을 쓰기도 한다.


8시 40분 풀어놨던 정신과 짐, 그리고 자리를 정리해야 할 시간이다. 천천히 걸어 사무실에 도착하면 8시 50분. 컴퓨터를 켜고 일을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점심시간이다. 러시아워 지하철 안만큼이나 치열하고 혹독한 점심밥 전쟁에 끼고 싶지 않아 챙겨 온 도시락을 여유 있게 먹는다. 먹은 자리를 정돈하고, 양치까지 해도 12시 20분. 옷을 챙겨 입고 나와 산책을 나간다. 근처 공원을 돌거나 멀리 있는 카페에서 생존을 위한 커피 말고 맛과 향이 있는 커피를 사 오기도 한다. 찬 공기로 몸과 마음을 환기하며 정돈하고 다시 오후 일을 시작한다. 화장실 몇 번 다녀오면 퇴근 시간. 컴퓨터를 끄고, 도시락을 가방에 넣고 사무실을 나선다. 아침에 챙겨 온 고단백 두유를 입에 물고 지하철역까지 천천히 걸어간다. 아침에 왔던 그 길을 연어처럼 거슬러 집으로 향한다. 저녁을 먹고, 요가센터에 갔다가 돌아와 씻고 누우면 11시. 잠시 핸드폰을 뒤적이거나 읽어야 할 책을 몇 장 넘기면 스르륵 눈이 감긴다. 그렇게 하루가 끝이 난다. 틀에서 찍어낸 붕어빵처럼 똑같은 모양의 5일이 지나면 주말. 휴일이라고 다를 건 없다. 특별한 약속이 없다면 평소보다 조금 더 느긋하게 자고 일어나 등산을 다녀온다. 씻고 부모님과 점심 외식을 한다. 그리고 남은 시간에는 뒹굴뒹굴하거나 글을 쓴다. 보통 나의 일주일은 이런 루틴으로 돌아간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뭘 그렇게 빡빡하게 사나 싶을 정도로 촘촘하게 움직인다. 매일 같은 시간에 산책하는 모습을 보고 이웃 사람들이 시계를 맞췄다는 전설의 인물, 칸트까지는 아니지만 각 시간에 해야 할 일을 정해 뒀다. 하는 것들을 보면 분명 시간 대비 가짓수가 많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느긋하고, 여유롭게 움직이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거다. 촘촘함은 오히려 틈을 만든다. 할지 말지, 갈지 말지, 먹을지 말지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똑같이 생산적인 결과물을 내는 시간은 아니지만 안절부절못하며 고민하느라 흘려버리는 것보다 차라리 여유 있게 멍을 때리는 쪽을 택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 생각 부자인 사람에게 루틴이 있는 삶은 잡생각을 획기적으로 줄여준다. Ctrl + C후 Ctrl +V 같은 무심한 날들 같지만 내게는 자극이 없어 오히려 무해한 날들이다.   


언제나 깜빡이도 없이 불쑥 튀어나오는 돌발 상황 때문에 조마조마하며 살았다. 계획대로 되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일이 더 많았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엉뚱한 결론이 나를 기다렸다. 그게 현실인 줄 알면서도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일들이 한 번씩 나를 관통하고 지나갈 때마다 만신창이가 됐다. 단련되고 내성이 생길 만도 한데 돌발 상황 앞에서 당혹감을 능수능란하게 감추는 유전자가 내겐 없었다.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하고 계획해도 일어날 일은 어차피 생긴다. 언제  인생에 불쑥 발을 들이밀지 모르는 ‘변수들을 완벽하게 대비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단단한 루틴이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미 벌어진 일에 쩔쩔거리는 대신 빠르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있다.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괴로워하는 대신 잠시 이탈한 경로를 바로 잡고, 원래의 루틴으로 돌아오면 된다. 루틴은 생각의 무게 중심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향하게 만든다. 일은 수습하면 그만이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다음 페이지로 넘어간다. 이게 바로 고민보다 Go!  해야 하는 이유다. 그래서 ‘ 참고 러브 다이브라는 가사가  귀에는 생각의 눈은  감고 루틴 다이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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