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남의 시선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것
짧지 않은 설 연휴 중 하루,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내 목적지는 집에서 멀지 않은 산. 차례도 없는 명절 연휴에 딱히 할일이 있던 건 아니다. 그간 못잤던 잠을 자고 먹고 자고 다시 일어나 먹고 자기를 반복하는 신생아 모드의 날들이었다. 정신차리고 보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오는 모래처럼 스르륵 사라지는 게 아쉬웠다. 연휴라 먹고 자기를 반복하느라 잔뜩 퍼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눈이 내린 지 한참 지났고, 그사이 푹한 날도 있었으니 어느 정도 눈이 녹았겠다 싶었다. 그래서 집에서 가방을 꾸릴 때 아이젠을 넣을까 말까 고민했다. 지난번, 산에 갔다가 덜 녹은 눈에 미끄러질 뻔한 아찔한 경험을 몇 번 하고, 겨울 산에는 아이젠 없이 오르지 말자 혼자 결심했다. 평소보다 2배는 힘들었던 겨울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아이젠부터 주문했다. 아이젠이 집에 도착한 지 한참이지만 그제야 겨우 포장을 풀었다. ’무겁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 넣고 가자. 쓸 일 없으면 웨이트 운동했다 치고, 쓸 일 생기면 돈 들여 산 보람이 있어 좋은 거지 뭐. 뭐가 됐든 좋은 거다’라고 긍정 회로를 돌리며 아이젠을 가방 깊숙이 넣었다.
산 아래에 도착해 등산 스틱을 꺼내고, 등산화 끈을 다시 묶으며 등산모드로 몸과 차림을 정돈하면서도 고민했다. 아이젠을 꺼낼까 말까. 흘깃 올려본 등산로는 하얀 눈은커녕 파운데이션 23호 샌드 베이지 톤의 흙이 보송보송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새벽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의 발에도 아이젠은 없었다. 괜히 짐 하나를 더 넣어 왔구나 싶어 아이젠이 원래의 무게보다 더 무겁게 느껴질 즈음, 나와 비슷한 체격의 여성분이 내려왔다. 그분은 발에 아이젠이 채워져 있었다. 필요하긴 하구나 싶어 막 오르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자리에서 아이젠을 장착했다. 발에 모래주머니라도 찬 듯 묵직한 아이젠의 무게가 느껴졌다. 얼음길이 없어도 이 정도면 평소보다 하체 운동은 더 되겠다 싶었다.
등산 경로와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앱을 켜고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자주 다니는 길이라 눈감고도 갈 수 있다. 얼마 전 한바탕 내린 눈은 흔적도 없다. 한 20분쯤 올라갔을까? 햇빛이 들지 않는 그늘 쪽에는 여전히 눈이 남아 있었다. 등산화 위에 덧신은 아이젠이 슬슬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아이젠을 신을 정도는 아닌데 나 혼자 오버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히말라야 아니 한라산을 오르는 것도 아닌데 장비를 풀 착장한 게 민망했다. 이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1시간쯤 올라가니 곳곳이 빙판이었다. 아이젠 없이 오르던 등산객들이 위험할 뻔한 순간을 여러 번 목격했다. 얼음이 가득한 돌계단과 빙판으로 변한 등산로를 곡예를 하듯 조심조심 오르고 있었다. 위험천만한 순간이 이어지자 뒤에서 보기만 했는데도 저절로 ’어이쿠’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고, ‘괜찮으세요?‘라고 직접 안부를 물어야 할 정도였다.
아이젠이 없었다면 분명 나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을 거다. 만신창이가 되다 못해 중도 포기를 하고 산을 내려와야 했을지 모른다. 무겁지만 아이젠을 챙겨 온 준비성 철저한 나를 칭찬하며 오르다 보니 어느새 정상이었다. 평평한 마당 같은 넓은 바위가 있는 정상도 빙판이긴 마찬가지였다.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 늘 앉는 소나무 그늘 아래로 향했다. 벤치 같은 작은 바위에 앉아서 쉬며 가만히 아이젠을 내려다봤다. 이게 없었다면 과연 나는 오늘 무사히 정상까지 올라올 수 있을까? 남들이 어떻게 볼지 몰라 부끄러워 아이젠을 놓고 왔다면 정상에서 고단백 두유를 먹으며 쉬는 이 성취감 가득한 휴식 시간을 만끽하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아이젠은 멋을 위해 착용하는 액세서리가 아니다. 나의 건강한 산행을 위한 안전 장비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뭐라고 하든 내게 필요하다면 장착해야 한다. 남들 시선을 의식하느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남들이 어떻게 볼까 두려워 내게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꾸역꾸역 입기도 했다. 내게 필요한 건 A였는데, A 대신 B를 택하기도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저 A보다 B가 남들 눈에 보기 좋으니까. 남들 눈 의식하느라 정작 내게 필요한 것이 뭔지 모르고 살았다. 그렇게 살다 보니 뭘 하든 불만족스러웠고, 결과도 좋을 리 없었다. 눈 쌓인 정상에 앉아 씁쓸한 기억으로 남은 날들을 천천히 곱씹었다. 정상의 칼바람이 정신차리라고 따귀라도 때리듯 양 볼을 세차게 강타했다. 얼얼해진 볼을 양손으로 살살 어루만져 살짝 녹인 후 아이젠을 고쳐 신었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내 몸의 안전을 책임져 줄 아이젠을 바르게 장착했다. 미끄러운 산에서 내려가야 하는 내가 믿고 기댈 건 남들의 반짝이는 눈이 아니다. 내 몸을 지켜 줄 존재는 투박하고 못생겼지만 날카로운 피크(뾰족한 쇠 부분)가 반짝이는 아이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