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신변잡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사 Jan 18. 2023

오늘도 첫 사이렌 오더의 주인공은 바로 나

강제 아침형 인간이 된 이유

 


지하철역 개찰구를 빠져나오면 오전 6시 55분. 가파른 계단을 오르느라 차오르는 숨을 가다듬으며 별다방 어플을 켜 사이렌 오더를 준비한다. [ 카페 아메리카노/ Hot / Tall / 개인 컵 ] 이제는 눈 감고도 주문을 할 수 있는 수준이다. 느긋하게 걸으며 세팅을 마친다. 7시가 되면 주문 가능 상태임을 알리는 진한 볼드체로 글자가 바뀐다. 생기 없던 글자에 활력이 생긴 걸 확인한 순간 버튼을 누른다. 오늘도 별다방 **역 지점 사이렌 오더 첫 주문의 주인공은 나다.     

 

생지옥 같은 러시아워를 피해 해도 뜨지 않은 캄캄한 새벽, 일찌감치 집을 나선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을 만큼 빽빽한 러시아워 지하철을 타는 일은 인류애를 잃는 일이다. 평균 이하인 키를 가진 사람에게 오전 8시 무렵의 지하철은 생존을 위협하는 곳이다. 호흡곤란과 동시에 이성까지 잃게 만든다. 이대로 있다가는 장기가 터지지 않을까? 언젠가 신문 기사에 쥐포가 된 인간이 나온다면, 그게 나일 게 분명했다. 고작 1시간의 지하철을 타고 왔을 뿐인데 이종격투기 풀 라운드 경기를 펼친 선수 상태가 된다. 산발인 머리와 너덜너덜해진 몸, 그리고 지친 마음을 겨우 이끌고 지하철 개찰구를 빠져나오며 다짐했다. 다시는 이 시간에 지하철을 타지 않으리라.     


내가 선택한 해결책은 단순했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움직이는 거였다. 출근 시간보다 두 시간 먼저 사무실 근처 별다방에 자리를 잡는다. 일찌감치 온다고 뭐 특별한 걸 하는 건 아니다. 집에서부터 들고 온 텀블러를 픽업대 근처 직원에게 건네며 짧은 아침 인사를 한 후 닉네임을 말한다. 자리를 잡고, 커피가 나오는 사이 노트북이나 책을 세팅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은 내 이름을 부른다. 커피가 채워진 텀블러를 받고 자리로 돌아온다. 커피를 홀짝이며 써야 할 글이 있으면 글을 쓰고, 못다 읽은 책이 있으면 느긋하게 책을 읽는다. 출근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 커피값을 허투루 쓰지 않으려면 글을 써야 한다. 목표했던 책장을 넘겨야 한다. 난 러시아워의 쥐포 인간이 되길 거부하는 대신 부지런한 한량이 되기로 했다.      


난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하루를 망치는 사람이다. 아침부터 삐끗하면 하루가 엉망이 된다. 아침 컨디션은 그날의 텐션을 좌우한다. 그래서 아침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한다는 #미라클 모닝이나 #갓생을 위해서가 아니다. 가뜩이나 바쁜 아침 시간을 쪼개 대단한 사람이 될 욕심은 없다. 그저 하루를 온전히 내 페이스와 텐션으로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퍼스널 스페이스는커녕 내 팔 하나도 내 맘대로 못 움직일 만큼 옴짝달싹할 수 없는 그곳에서 귀한 내 에너지를 소진하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작고 귀여운 내 에너지를 써야 할 곳은 러시아워 지하철이 아니라 바로 나다.   

    

정해진 시간 동안은 몸과 마음이 매여 있어야 한다. 퇴근 후에는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 겨우 집에 돌아와 밥을 먹고, 운동하고, 씻으면 이미 10시가 훌쩍 넘는다. 그때쯤에는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도 에너지도 바닥난 상태다. 시간에 쫓기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일에 휩쓸려가지 않으려면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퇴근 후에는 기력이 남아 있지 않을 테니 출근 전을 택했을 뿐이다.

     

언제까지 별다방 사이렌 오더 1등을 차지하는 일이 기쁨으로 다가올지 모르겠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좋아서,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혼자만의 목표 달성 놀이에 언젠가 흥미를 잃을지 모른다. 그래도 하는 동안은 러시아워 지하철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몸의 안락함과 마음의 평화를 아낌없이 즐길 거다. 본격적인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사람에 치이고 시간에 쫓겨 뾰족뾰족한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가 되는 대신, 모닝 한량이 됐다. 아침에 눈을 뜨는 건 여전히 괴롭지만, 잠깐의 늑장이 나의 쾌적한 아침을 갉아먹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후 새벽 5시면 번쩍 눈을 뜬다. 등에 스프링이랑도 달린 듯 몸을 튕겨 일으킨다. 몸도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는다. 지하철을 타는 내내 눈감고 헤드뱅잉을 하며 쪽잠으로 부족한 잠을 보충한다. 출근 전 오롯한 나만의 2시간을 누리기 위해 오늘도 새벽길을 나선다. 그리고 사이렌 오더 1등 달성이라는 하찮은 기쁨으로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온전한 축하가 어려운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