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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an 16. 2023

온전한 축하가 어려운 이유

옹졸한 마음이 데려온 옹졸한 결과

근래에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 덕분에 축하받는 일도 잦아졌다. 과분한 축하와 마음이 담긴 선물을 받았다. 기쁜 마음으로 축하의 인사와 선물을 받을 때 습관처럼 상대방의 표정을 유심히 살핀다. 마치 자신에게 생긴 일인 것처럼 기뻐해 주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축하의 끝에는 씁쓸한 기분이 밀려온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시기나 질투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생각의 방향은 자신에게로 향한다.      


쟤가 저런 좋은 결과를 얻을 동안
나는 뭐 했지?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내게 생긴 좋은 일은 누군가에게 숙제를 안긴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지금까지 나는 대부분 숙제를 떠안은 사람 쪽이었다. 좋은 학교나 이름난 회사에 가고, 비싼 차와 커다란 집을 사는 사람 곁에서 아낌없이 축하를 보내는 ‘프로박수러’였다. 체지방률 10% 이하 상태로 바디 프로필 찍기나 회계사 시험 합격 같은 내가 전혀 관심 없는 분야의 성취를 이룬 사람에게는 오히려 흔쾌히 손뼉을 쳐줄 수 있다. 하지만 출발점이 비슷하거나 꿈의 모양이 비슷한 분야에서 성과를 이룬 사람에게는 시원한 박수가 나오지 않았다. 대체 나는 저 사람보다 뭐가 못나서 이렇게 손뼉만 치고 있을까 싶어서.      


못난 건 재능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분명 상대방이 노력해서 얻은 결과인데 과정 쪽에는 눈을 감고, 결과만 보면서 부러워하기 바빴다. 몸을 움직이기는 귀찮고, 결과만 얻길 바랐다. 옹졸한 마음에 온전한 축하를 하기 힘들었다. 원하는 결과를 얻고 반짝이는 사람 곁에서 구깃구깃한 몸과 마음으로 100%의 축하를 보내지 못하는 나 자신이 싫고 미웠다. 나는 왜 이토록 소인배일까? 자책하며 한없이 작아졌다. 나의 이런 못난 경험들이 예민한 더듬이를 발동시킨다. 상대방을 향한 축하에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비교’에 나는 또 한없이 초라해지기를 반복했다.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몽테스키외는 말했다. ‘우리는 그저 행복해지려면 쉽게 행복해질 수 있지만, 언제나 남보다 더 행복하려 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나의 결과가 매번 변변치 않고, 보잘것 없었던 이유는 ‘남보다‘를 기준에 두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남들이야 어떻든 뭐라고 하든 내가 원하고 바라는 목표에 집중한다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쉽다. 반면, 남들과 비교하며 에너지를 소진하고, 자신을 갉아먹으면 목표에 닿기도 전에 무너지게 마련이다. 그동안 내가 부정적인 마음으로 살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되는 일 하나 없는 사람에게 너그러움을 찾을 수 없는 이유다.       


누군가의 성취를 볼 때, 순도 100%의 온전한 축하를 건네려고 노력한다. 상대의 성취를 나의 현재와 비교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나의 결과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고, 그에 부끄럽지 않은 노력을 하는 중이니까. 비교할 필요도 없고, 조급할 이유도 없다. 각자 삶의 모양이 있고, 각기 다른 인생의 목표가 있으니까. 열매를 맺을 시기는 같을 수 없고, 열매의 크기나 맛도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이 당연한 진리를 인정하고 나니 예상보다 빠른 결과를 얻게 됐다. 크고, 달고, 단단한 열매를 맛보게 됐다.     


내게 건넨 축하의 인사 끝 씁쓸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던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표정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옹졸하고 조급했던 과거의 내 모습 같아서. 온전히 축하하지 못하는 그 마음을 품은 내가 밉고 싫어서 눈을 질끈 감아 버리던 내 모습이 떠올라서. 하지만 그 마음의 폭풍은 오롯이 혼자서 추슬러야 한다.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이다. 괴롭고 지루한 그 시간이 지나면 분명 좋은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포기하지 않고 뚜벅뚜벅 나아가길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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