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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Feb 16. 2023

나도 내비게이션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과생 여러분, 인생 내비게이션 개발 부탁드립니다

 

언젠가 친구와 여행할 때였다. 사정상 내가 먼저 거제에 내려와 있고, 친구는 일이 끝난 후 밤에 합류한 적이 있다. 새벽에나 도착할 거 같다고 먼저 자라고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서울에서 거제까지 늦은 밤 초행길을 달려오는 친구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평소 지독한 길치, 방향치인 친구가 거제 구석의 숙소까지 무사히 올지가 무슨 대단한 미션처럼 느껴졌다. 선잠을 자다 깨다 반복하다가 삑삑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미리 알려준 숙소 비밀번호를 누르는 친구였다. 도착 예상 시간에 거의 정확히 도착했다. 부스럭거리며 불을 켜고 눈을 비비며 친구를 맞아줬다. 먼저 자라고 했더니 왜 일어났냐는 말에 걱정돼서 깊게 잠을 잘 수 없었다는 내 말에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뭐가 걱정이냐?
내 차 가지고 운전해서 오는데.
내비게이션이 다 알려줘.

보통 서울에서 만날 때는 차를 가져오지 않고 편안하게 만난다. 서울 시내 안이라면 주차하기도 힘들고, 술 먹을 계획이라면 차를 두고 오는 게 편하다. 그런 상황에 익숙해 친구가 길치여도 1N년차 자가 운전자라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서울 한 복판에서 길을 잃는 친구도, 내비게이션만 있다면 서울에서 거제까지 한방에 달려올 수 있다. 이게 바로 내비게이션의 파워다.    

   

친구와 달리 나는 길을 잘 찾는 편이다. 낯선 땅에 떨어져도 종이지도든 스마트폰 지도 어플이든 뭐라도 있다면 원하는 목적지를 찾아가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한 번도 길을 잃은 적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길을 잃었다 해도 오래 헤매지 않고 목적지에 닿는다. 내가 길을 찾는 방법은 간단하다. 머릿속에 지도를 그리고 주요 랜드마크를 찍어 둔다. 그걸 중심으로 동서남북 방향을 정하고 목적지로 향하면 어렵지 않게 원하는 곳에 도착한다. 헤매더라도 출발점까지 돌아갈 필요가 없다. 가장 가까운 랜드마크에서 다시 방향을 잡으면 된다.


하지만 이런 나도 길을 헤매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 초행길을 목소리 큰 동행자와 함께 갈 때다. 나도 처음 가는 길이라면 내가 인간 내비게이션이니 닥치고 따라와!라고 강요할 수 없다. 상대방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가는 길을 정한다. 목적지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느낌이 들어도 그건 느낌일 뿐. 정확한 근거가 없다면 일단 상의하면서 간다. 혼자 가는 길이 아니고 같이 가는 길이니까.     


여유가 있다면 헤매는 길도 즐겁다. 효율만 따져 빠르게 목적지로 향했다면 보지 못했을 풍경과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담장 위를 그야말로 ‘캣워크’로 도도하게 걸어가는 길고양이를 같이 보기도 하고, 부지런한 할머니가 정성스레 가꾼 대문 앞 미니 정원을 함께 구경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유가 있는 경우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여유를 가지기 어렵고, 헤매는 건 곧 실패고 시간을 낭비했다는 죄책감에 휩싸인다.     


요즘 내비게이션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운전면허도, 차도 없으니 실물 내비게이션을 줘도 소용이 없다. 내게 필요한 내비게이션은 내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인생 내비게이션’. 출발지와 목적지를 검색창에 넣으면 최적의 길을 추천해 주는 내비게이션이 필요하다. 비용이 많이 들지만 빠르게 도착할 수 있는 코스나, 혹은 시간은 좀 걸리지만 복잡함을 피할 수 있는 코스 등 여러 선택지를 주는 기능도 있었으면 좋겠다. 바쁘다면 고민하지 않고 최적의 경로를 선택할 거다. 하지만 여유가 있다면 나의 에너지 상태나 혼잡도, 시간대의 특성에 따라가고 싶은 길을 택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도 충분히 열심히 하지만 이과생들이 조금만 더 힘내줬으면 좋겠다. 이미 길 찾기 용 내비게이션의 성능은 필요 이상으로 훌륭하니 그 에너지를 조금 다른 곳에 기울여주길 바란다. ‘인생 내비게이션’ 개발에 집중해 나처럼 삶의 길을 헤매는 사람들을 구원해 준다면 아마 노벨 평화상을 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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