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살고 있다는 기분을 채우고 싶다면 답은 샐러드
명절이나 아빠 생신 같은 집안의 큰 행사가 있는 날에는 어김없이 등판하는 메뉴가 있다. 커다란 양푼에 사과를 베이스로 오이, 귤, 양배추, 메추리알, 맛살, 햄, 건포도, 땅콩 등등을 들이붓고, 마요네즈로 버무린 일명 ’과일 사라다’. 그게 바로 내 인생의 첫 샐러드였다. 사과인 줄 알았는데 삶은 감자가 집히거나 귤인 줄 알았는데 단감이었을 때의 실망감은 어린 마음에도 교훈을 남겼다. ‘겉모습만 보고 현혹되지 말자’
조금 더 자라 고등학생이었을 때는 피자집의 무제한 샐러드바가 한창 유행이었다. 오전 수업만 있던 토요일이면 야금야금 모은 용돈을 쥐고 피자집으로 향했다. 접시당 계산이었던 시절에는 손바닥만 한 접시에 얼마나 많이 담느냐로 자존심 경쟁을 하기도 했다. 무제한이었던 시절에는 얼마나 자주 그리고 많이 먹었는가로 자웅을 가렸다. 먹성 좋은 청소년들의 지나간 샐러드바는 마치 메뚜기 떼가 훑고 간 논처럼 폐허가 됐다. 그 때문이었을까? 언제부턴가 무게당 계산을 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사회인이 되고서는 뷔페형 샐러드바가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이 단골 모임 장소였다. 눈치 보지 않고 오래 앉아 수다를 떨며 원하는 취향의 샐러드를 비롯한 각종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샐러드라는 이름에는 묘한 힘이 있다. 많이 먹어도 덜 살찔 거 같은 기분? 그저 기분뿐이다. 현실은 샐러드는 그저 거들뿐, 애피타이저 삼아 샐러드 한 접시를 먹고, 보통 때보다 더 다양하고 많은 양의 음식을 먹어댄다. 많이 먹어도 살이 안 찌길 바라는 염치없는 욕심을 부리며 다이어트 강박에 시달리던 시절이라 내가 먹은 건 샐러드일 뿐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어 보지만, 현실은 차갑다. 다음날 몸무게를 재면 어김없이 2~3kg이 늘어 있다.
앞은 캄캄하고, 속은 부대낄 때, 도무지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를 때는 샐러드를 먹는다. 무시무시한 칼로리의 마요네즈 베이스 드레싱을 끼얹어도 ‘샐러드’란 이름이 붙은 음식을 먹으면 뭔가 가볍고 산뜻해지는 기분이다. 양상추를 베이스로 빨강 노랑 파프리카에 삶은 달걀과 바싹하게 구운 베이컨을 얹고 시저 드레싱을 뿌리던, 구운 두부를 식혀 올리고 간장 베이스의 오리엔탈 드레싱을 끼얹던, 작게 자른 게맛살과 방울 모차렐라 치즈를 올린 후 올리브 오일과 발사믹 소스를 뿌리던 적은 노력만으로도 그럴싸한 요리가 탄생한다.
샐러드는 일단 눈으로 보는 재미가 있다. 접시라는 액자 위에 담긴 예술 작품 같다. 불규칙하게 흐트러져 있는 채소와 과일, 그리고 토핑 위로 대비되는 색의 드레싱이 뿌려지면 마치 추상미술 작품을 보는 기분이다. 다음으로는 씹는 즐거움이 있다. 샐러드 채소가 아삭하게 씹힐 때면 내 안에 쌓여있던 불쾌한 감정이나 머리를 어지럽히는 문제도 아삭 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잘게 씹혀 식도로 함께 넘어가는 기분이다. 그리고 버라이어티한 맛이 있다. 생으로든 익히든 채소를 베이스로 어떤 토핑을 얹느냐, 어떤 드레싱을 조합하느냐에 따라 매일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건 샐러드를 먹는 기분이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기분 나쁘게 배가 부르지 않다. 오히려 그간 몸을 망가뜨렸던 나쁜 음식을 먹었던 날들의 죄책감을 지워주는 ‘속죄의 음식’이다. 몸과 마음의 부담을 주지 않는 샐러드가 있어서 나름 잘살고 있다는 기분이 채워진다.
입맛이 없을 때, 먹고 싶지 않아도 뭔가를 먹어야 할 때 샐러드를 주문한다. 배를 채우기보다는 지친 마음을 채우기 위해 샐러드를 먹는다. 한 발을 떼기도 힘들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는 천천히 우물우물 샐러드를 씹으며 생각한다. 산처럼 쌓여있던 샐러드도 하나하나 먹다 보면 결국 바닥이 드러난다. 샐러드 한 접시를 말끔하게 비운 것처럼, 머리를 어지럽히는 걱정과 고민도 언젠가 깨끗하게 비워질 거다. 나는 지금 무너지지 않고 샐러드를 먹고 있으니 곧 기운을 차릴 거고, 다시 원래의 패턴대로 잘 살아갈 거라는 밑도 끝도 없는 용기가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