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신변잡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사 Apr 03. 2023

샤넬 백은 못 사도 ○○계의 샤넬은 살 수 있으니까

샤넬 백이 없어도 당당한 이유

토요일 오후, 송추계곡 인근 오봉 능선을 타고 가다가 명동 뺨칠 만큼 인파로 북적일 도봉산 쪽으로 향했다. 사람 많은 걸 두드러기 날 만큼 싫어하는 내가 그 쪽을 하산 루트로 택한 건 뚜렷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1년간 나의 관절을 지켜 준 등산 스틱과 작별을 해야 할 때가 온 거다. 초보용 가성비 좋다는 등산 스틱으로 지난 1년간 많이도 다녔다. 지난해, 혹서기 1달과 혹한기 2달을 제외하면 거의 2주에 한 번 산에 올랐다. 그렇게 부지런히 다녔으니 탄탄했던 등산스틱은 아무리 힘껏 조여도 몇 분만 올라도 힘없이 주르륵 풀렸고, 휘청였다. 새 등산스틱이 필요한 타이밍이다.     


몇 주간의 검색과 비교 끝에 ‘등산 스틱계의 샤넬’이라 불리는 브랜드 제품이 벌컥 문을 열고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 믿음과 신뢰의 독일 브랜드 제품은 가볍고, 탄탄하고 휴대성까지 좋았다. 그 브랜드 오프라인 매장이 등산용품계의 성수동이자 가로수길인 도봉산 입구에 있다. 온라인으로 살 수도 있지만 몸과 합이 잘 맞아야 하는 스틱은 손으로 직접 만져 보고 사고 싶었다. 막걸리 냄새와 트로트 음악으로 충만한 하산로를 따라 내려갔다. 멀리서 반가운 그 브랜드의 간판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매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산한 매장에는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은 카운터에 앉아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었다. 직원으로 보이는 젊은 남성은 물건 정리에 한창이었다. 들어가자마자 카운터로 직진해 여성에게 말했다.     


등산스틱 추천해 주세요  

다소 높은 가격대 때문인지 들어와서 두리번거리다 조용히 간만 보고 사라지는 손님들이 유독 많았던 매장. 그런 분위기에서 직진하는 손님이 생소했는지 잠시 내 위아래를 스캔한 주인은 바로 스틱 섹션으로 향했다. 위아래로 훑은 건 내 키와 체형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키가 작은 평균 체중의 여성에게 맞는 제품 두 가지를 권했다. 가격, 무게, 색깔, 기능에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저렴했지만 무거운 제품 대신 살짝 가격이 있지만 가벼운 제품을 택했다. 등산을 몰랐던 시절, 누군가 이 가격의 등산 스틱을 산다고 말했다면 미쳤다고 할 가격이었다. 겨우 등산용 지팡이에 이 돈을 쓴다고? 기가 찰 금액이었다. 매장에 들어가 결제까지 고작 5분 남짓. 결제 후 10분 가까이 설명이 이어졌다. 물건을 고르고 결제한 시간 보다, 제품 사용법에 대한 설명이 더 길었다. 브랜드의 우수성과 제품의 특성, 주의점까지 세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마치 자부심과 세심함이 가득했던 명품매장 직원의 설명을 듣는 기분이었다. 아~ 이래서 이 브랜드를 등산 스틱계의 샤넬이라고 하는구나.     

 

샤넬 백 어깨끈 가격보다 저렴할 등산 스틱을 데리고 첫 산행을 다녀왔다. 진달래와 벚꽃, 개나리가 만발한 산길을 오르내리며 괜히 ‘등산 스틱계의 샤넬’이라는 별명이 생긴 게 아님을 확인했다. 접착제라도 붙인 듯 손잡이는 손에 착 달라붙었다. 길고 긴 영어와 숫자가 뒤섞인 복잡한 제품명 사이 ‘슈퍼 라이트’라는 단어에 걸맞게 가볍고 탄탄했다. 이 친구와 함께라면 어느 험한 산이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지난 2월 요가 매트계의 샤넬에 이어 등산 스틱계의 샤넬이 내 품에 들어왔다. 이 나이대 웬만한 사람 다 있다는 샤넬 백은 없지만 등산 스틱과 요가 매트는 샤넬급을 보유한 사람이 됐다. 솔직히 샤넬 백을 살 돈도 없지만 산다 한들 들고 갈 곳이 없다. 샤넬 백에 맞춰서 입을 옷도, 신을 신발도 내겐 없다. 나는 어디를 가든 뭐가 묻어도 물세탁이 가능한 가벼운 에코백과 함께한다. 다만 검은색과 베이지색 두 가지로 때에 따라 돌려 맬 뿐이다.      


물론 샤넬 백을 사는 용기와 재력은 부럽다. 샤넬 백을 에코백 사듯 사는 사람들의 선택 또한 존중한다. 하지만 난 샤넬 백 살 돈과 기회가 있다 해도 샤넬백 사는데, 돈을 쓰지 않을 게 분명하다. 내게 당장 필요한 건 샤넬 백이 아니다. 생긴다 한들 옷장 안을 벗어나지 못할 샤넬 백 보다는 매주 내 관절을 지켜주고, 근력을 채워주는 취미 용품에 투자하는 게 내겐 더 합리적인 소비다. 시즌별 신상 샤넬 백보다 밀리지 않는 요가 매트와 휘청이지 않는 휴대성 좋은 등산 스틱이 더 간절하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내게 필요한 것들을 채울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되어 가는 중이다. 샤넬 백이 없다고 주눅 들기보다 내 기준에서 합리적이고 가치 있는 일에 돈을 지불하는데 거리낌 없는 사람이 됐다. 이게 바로 취향이라는 이름의 힘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무 말 대잔치가 필요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