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불쏘시개와 잿덩이는 한 끝 차이
NN년 전, 꼬꼬마 막내 때의 일이다. 당시 유행하던 초록색이나 파란색 크로마키 앞에서 VJ 단독으로 진행하는 프로그램 녹화 중이었다. 하루에 5일 치 데일리 방송을 기계처럼 뽑아내야 하는 빠듯한 스케줄이었다. 이제 갓 데뷔를 한 어린 VJ는 얼마나 대본을 달달 외워 왔는지 리딩할 때는 멘트를 곧잘 했다. 하지만 녹화가 시작되자 상황은 반전됐다. 한 호흡에 한 문장을 다 말하지 못할 정도로 연신 NG를 냈다.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오면 머릿속에 정지버튼이 눌렸는지 열심히 연습했던 멘트가 꼬였다. 우여곡절 끝에 멘트를 이어가길래 이제 끝이구나 안도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마무리 멘트에서 삐끗했다.
햇병아리 VJ가 NG를 낼 때마다 조명, 카메라, 음향 등등 각종 장비를 담당하는 스태프들의 차가운 눈빛과 깊은 한숨이 스튜디오 안팎에 가득 찼다. 스튜디오 내에 수많은 카메라 화면 조정장치 및 영상 신호 전송 장비를 컨트롤하는 부조정실에 있던 나 역시 슬슬 지쳐갔다.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를 때쯤, 또 NG가 났다. 이 상황에도 전체 책임자였던 선배는 느긋하게 VJ의 말을 끊지 않고 그대로 진행했다. 낡은 자동차를 타고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버벅거리던 VJ의 멘트가 다 끝나고서야 말했다.
“다 좋았는데 한 군데가 씹혔어요. 힘내서 다시 해봅시다.”
선배의 말에 벌컥 화가 났다. 시간은 없고, 체력은 바닥났다. 게다가 까마득한 고참 기술 스태프들의 눈치가 보여서 토크 백(부조정실과 스튜디오 안의 진행자 간의 의사소통을 위한 무선 통신 도구)이 닫히자마자 말했다.
“선배, NG 났으면 바로 끊고 시작해야지, 쓰지도 못할 말을 언제까지 다 들어요. 이거 편집해도 못써!! 여기 스태프들 지친 거 안 보여요?”
고슴도치처럼 뾰족한 가시 세운 내 말에, 하나는 알고 열은 모르는 바보를 다독이듯 인자한 보살의 미소를 지으며 선배가 말했다.
“나라고 안 답답하겠냐? 나도 속 터져. 근데 답답하다고 중간에 말을 끊잖아? 저 정도 신인이면 평소에 잘하던 것도 얼어서 못 해. 지금 얼마나 주눅 들었겠냐? 우리가 기다려 줘야지.”
무슨 청춘 영화 주인공 같은 바른생활 풍 멘트를 던지는 선배를 보고 ‘천사병‘ 걸린 인간인가? 싶었다. 내게 이 상황은 청춘영화가 아니라 서스펜스 스릴러 오피스 물이었다. 살인마에게 쫓겨 바스러지는 엑스트라 1처럼 나는 일정에 쫓기고 있었다. 오늘 목표치를 못 채우면 나는 밤샘 지옥에 빠져야 했다. 이런 상황에 바르고 고운 말을 하는 선배가 NG 자판기 같던 신인 VJ보다 더 얄미웠다.
첫 녹화부터 흑역사를 적립해서일까? 이를 갈고 준비한 덕분일까? 아니면 천사병 말기 선배에게 은혜를 갚으려는 까치... 아니 피나는 노력 덕분일까? 신인 VJ의 맹활약에 다음번 녹화는 첫 녹화의 절반 시간 안에 끝났다. 무섭게 실력이 늘었던 VJ는 멀지 않아 이곳저곳에서 러브콜을 받는 방송계의 유망주로 성장했다. 답답함에 스태프들의 한숨을 유발했던 초짜 VJ는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 번듯한 MC로 자리 잡았다. 그 VJ는 NG를 불쏘시개 삼아 자신의 열정을 불태웠을 게 분명했다.
1년 후쯤에는 우리가 담기엔 큰 인물이 된 VJ. 더 높은 곳을 향해 훨훨 날아갔다. 새 VJ와 얼추 호흡이 맞아 갈 때쯤이었다. 늘 그렇듯 때를 놓치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 한쪽에 있던 TV 속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그 초짜 VJ는 이제 당당히 MC가 되어 게스트를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선배와 나는 동시에 VJ의 익숙한 얼굴을 확인하고 눈을 마주쳤다.
“와~ 잘 컸네!”
“선배가 키웠지 뭐. 카메라만 돌아가면 얼음이 되는 친구를 방송 기계 만들었잖아.”
“맞아! 그 NG들 잘라내느라 초반에는 매일 밤새웠어. 그때 생긴 다크서클이 아직도 안 지워져. 보이냐 이거? 나 저 친구한테 다크서클 치료비 청구할까 봐.”
그 어수룩한 신인 VJ처럼 낯선 판에서 NG를 무수히 적립하고 있는 요즘, 천사병 말기 선배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때 숨 쉬듯 내던 NG가 없었다면 떠오르는 방송 기계도 존재할 수 없다. 초심자를 기다려 주지 않으면 숙련자도 없다. NG의 벽에 가로막혀 옴짝달싹 못 할 때,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지금 적립하고 있는 NG들은 열정의 불쏘시개일까? 아니면 다 타고 남은 처치 곤란 잿덩이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