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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pr 17. 2023

논알콜 맥주로 마감하는 하루

흉내 내느라 지친 나를 위로하는 맥주 흉내 낸 탄산음료

퇴근-> 요가-> 샤워-> 잠으로 끝나는 하루를 마감하는 루틴에 변화가 생겼다. 잠들기 전 전에 논알콜 맥주 한 캔이 추가됐다. 곧 있을 건강 검진을 생각하면 자제해야 하는 게 좋다는 걸 알면서 끊을 수가 없다. 발단은 즐겨 듣는 팟캐스트였다.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주제인 팟캐스트를 즐겨 듣는데 진행자들은 매회 자신들이 쓰고, 입고, 먹고, 읽고, 보고, 느낀 좋았던 것들을 추천해 준다. T사의 논알콜 맥주를 소개하는 회차를 들은 건 한참 전이었지만 직접 먹어 본 건 2주 전이 처음이었다.      


아무리 쥐어짜도 물 한 방울 안 나올 마른 수건 같은 나를 하루 종일 쥐어짜고 또 짜고 퇴근한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비집고 들어갈 틈 하나 없는 빽빽한 지옥철이다. 새끼손톱만 한 틈이라도 보이면 비집고 들어간다. 한 10 정거장쯤 견디면 쥐포만큼 압축된 몸을 풀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긴다. 한 시간여의 지하철 고행이 끝나고 역 밖으로 나온다. 두 발만으로는 걷기 버거워 네발로 기어서라도 집에 가고 싶다. 하지만 사회적 체면이 있으니 마지막 에너지를 끌어모아 두 발바닥에 힘을 빡 주고 걷는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이리저리 휘둘리느라 지친 내가 향하는 곳은 따뜻하고 조용한 요가 센터. 1시간 동안 몸을 구기고 늘리다 보면 불안과 걱정으로 소진됐던 몸에 잔잔한 에너지가 채워지는 기분이다. 하지만 기분은 기분일 뿐 몸은 흐물흐물 물오징어 상태다. 집으로 향하다 땀에 절어 못생김이 폭발하는 얼굴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고개를 무심코 가게 유리창으로 돌렸을 때 눈에 들어온 게 바로 T사의 논알콜 맥주였다. 마침 내가 고개를 돌린 곳이 편의점이었고, 공교롭게도 편의점 안 맥주 냉장고에 시선이 꽂혔다.      


세이렌에게 홀린 뱃사공처럼 스르륵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논알콜 맥주 5개를 샀다. 가방은 묵직했지만, 마음이 가벼웠다. 왜인지 이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모래주머니를 찬 듯한 묵직한 발걸음이어야 할 시간, 논알콜 맥주 덕분에 부스터를 단 듯 빠르게 집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서부터 흐느적거리며 마스크, 겉옷, 가방을 몸에서 하나씩 벗겨내며 방으로 걸어간다. 하지만 논알콜 맥주가 있는 날은 달랐다. 곧장 맥주를 냉장고에 쟁여두고 빛의 속도로 씻었다. 머리를 말리고 간단히 밥을 먹고, 그사이 더 차가워진 맥주를 꺼내 방으로 들어왔다.      


술보다 술자리를 좋아하는 편이다. 술 한 모금만 들어가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빨개지는 편이라 처음 보는 사람과는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 불편한 자리에서는 술 한 모금에도 울긋불긋 반점이 올라오는 체질을 무기 삼아 권하는 술을 정중히 피하기도 했다. 술자리에서 친분이 쌓이고, 인연이 생기고, 비즈니스가 성사되는 과정들을 보면서 부러워했던 시절도 있다. 나는 왜 술을 못 마실까? 알코올에 약한 체질이 바뀌길 바라며 특훈(?)을 해본 적도 있지만 난 애초에 술이 잘 받는 성향과 체질이 아니었다. 그러니 집에서도 딱히 술을 마시는 일은 없었다. 시뻘게진 얼굴을 굳이 가족들에게까지 보여주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논알콜 맥주가 있었다. 아니 그 존재는 이미 오래전에 알았지만 딱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게 맥주가 필요한 시즌이다. 차가운 맥주 모금이 들어가면 뜨뜻미지근한 정신을 바짝 차려줄 거 같았다. 톡톡 터지는 탄산과 함께 내 안의 답답함도 터져 사라질 거 같았다. 그런 기대를 안고 마신 T사의 논알콜 맥주는 신세계였다. 내 기준으로 맥주 맛과 향은 거의 같은데 아무리 먹어도 얼굴이 빨개지지 않았다. 이전에 먹었던 다른 브랜드의 논알콜, 무알콜 맥주를 먹었을 때의 밍밍함, 가벼움 때문에 아쉬웠던 부분이 느껴지지 않았다. 술 마신 느낌은 나지만 취하지는 않는 술이라니. 알코올에 취약한 인간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선택이다.      


알콜은 없지만 맥주를 흉내 낸 T사의 논알콜 맥주를 마시며 하루를 마감한다. 온종일 괜찮은 사람인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전전긍긍하지 않은 척, 당황하지 않은 척, 무덤덤한 척, 멀쩡하지 않은데 멀쩡한 사람 흉내 내느라 소진한 몸과 마음에 논알콜 맥주를 채운다. 아무리 먹어도 취하지는 않고, 그저 배만 나올 뿐인 논알콜 맥주가 있는 밤. 내일의 일은 내일의 내가 해 낼 테니, 일단 오늘은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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