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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pr 12. 2023

코인 육수를 닮고 싶어서

조미료에 비친 내 모습

"잔치국수나 해 먹자!"     


일요일 점심, 아빠의 한마디가 어깨너머에서 갑자기 날아들었다. 잔치국수는 계획에 없던 메뉴였다. 간단히 김밥을 말아 라면과 함께 먹을 생각이었다. 원하면 대령하는 게 일요일 점심 담당의 의무이자 덕목. 김밥을 말면서 시계와 냉장고 속 재료들을 머릿속으로 재빨리 스캔했다. 잔치국수의 생명은 육수. 분명 국물용 멸치도 있고, 무도 있고, 다시마도 있지만 육수를 내기 몹시 귀찮다. 재료 준비와 과정이 번거로운 건 물론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럴 때는 공산품의 힘에 기대는 게 21세기를 사는 현명한 자의 지혜다. 얼마 전부터 애용하기 시작한 고체 육수를 꺼냈다. 사탕처럼 개별 포장된 동글 납작한 모양이 동전을 닮아 일명 ’ 코인 육수’라 불리는 고체 타입 육수다.      


냄비에 물을 넣고 코인 육수 3개를 퐁당 빠뜨렸다. 아빠, 엄마, 내가 각 0.5인 분, 동생이 1.5인 분을 먹기 때문에 3인 분이면 충분하다. 한쪽 화구에는 국수를 삶을 냄비를 동시에 얹었다. 오른쪽에서는 국수가 삶아지고, 왼쪽에서는 육수가 끓었다. 고체였던 육수가 물에 녹고 팔팔 끓고 난 후 한입 맛을 봤다. 살짝 간이 부족한 거 같아 국간장을 한 바퀴를 두르니 단 10분 만에 진한 육수가 완성됐다. 삶은 면을 대접 안에 똬리를 틀어 앉히고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국수 옆구리 쪽에 조심스럽게 육수를 부었다. 잘게 자른 신김치와 볶은 애호박을 얹으니 뚝딱 잔치국수가 탄생했다.


양파, 멸치, 무, 다시마 등등 원물 재료를 가득 넣고 육수를 내면 맛은 좋았지만, 들어가는 재료와 시간, 비용이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산더미 같은 음식물 쓰레기는 영원히 해결하지 못할 숙제 같았다. 그런 상황에 코인 육수의 등판은 신세계였다. 국내산 원료와 자연 유래 성분을 마케팅 포인트로 잡고 나 같은 겁 많고 귀찮음은 더 많은 텅 빈 사람을 공략했다. 사실, 화학 첨가물 없이 동결 건조한 해산물과 채소 분말을 사용했다는 홍보 포인트보다 모양에 끌렸다. 동전보다 작은 동그란 고체가 그렇게 내 마음속에 굴러들어 와 장바구니에 안착했다.  


고향의 맛, 다*다 같은 MSG를 쓰는 건 마음이 편치 않았다. MSG의 안전성은 입증된 지 오래지만, 부정적 이미지는 아직 내 머릿속에 사라지지 않았다. 나처럼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들을 공략하기 위해 식품업계의 엘리트들은 꾸준히 연구 중이다. 가루 MSG가 안 먹힌다면 농축액이나 고체로 형태를 바꿔가며 신제품을 쏟아낸다. 참치, 홍게를 방패 삼아 바다에서 온 감칠맛으로 유혹한다. 비건, 친환경, 국내산 등 소비자가 혹할 단어들을 덕지덕지 붙여 새로운 제품인양 광고한다. 트렌드에 민감하고 똑똑한 (척하는) 소비자들을 사로잡기 충분하다. 하지만 시즈닝, 맛 베이스, OO 분말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복합원료의 이름이 가득한 성분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마도 MSG의 사촌쯤? 결국 같은 핏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MSG는 유해성 논란에 휩싸여 주방에서 퇴출당한 시절도 있었다. 비난과 핍박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정진하며 변신을 거듭한 결과 야금야금 본래의 지분을 되찾고 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 지분을 떠먹여 줄 리 없다. 가루에서 액체로, 다시 고체로 변화를 거듭해 온 결과다. 시대의 흐름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위해 끊임없이 변신했다.      


음식의 감칠맛을 더하는 조미료의 진화 속에서 오늘의 내 모습이 반사되어 보였다. 길고 험난했던 MSG의 역사에 비하면 단조롭고 귀엽기 짝이 없는 나의 역사. 그런데도 뭐가 그렇게 두려워서 매번 같은 모양으로 안주하고 있을까? 필요하다면 가루가 되도록 까이기도 하고, 물 흐르듯 유연하게 넘길 때도 있어야 한다. 그걸 알면서도 바꾸기가 두렵다. 그래서 코인 육수가 부럽다. 내공을 응축해 단단해진 코인 육수를 닮고 싶다. 육해공 재료가 총출동해 감칠맛을 내듯 형형색색 다양한 경험과 생각이 모이면 삶의 감칠맛이 제대로 우러날 거다. 필요한 순간에는 응축했던 맛을 아낌없이 퍼트리는 파급력까지 겸비하기 위해 일단 오늘의 맛을 적립한다. 오타의 쓴맛과 거절의 매운맛, 조회수 폭발의 단맛이 오늘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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