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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May 22. 2023

신발이 참 예뻐요

발로 먹는(?) 마음 안정제 

집으로 가는 마지막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였다. 빨간불이 초록불로 바뀌기를 기다리며 집에 가서 해야 할 일들을 머리에서 순서대로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다. 일단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은 후 간단히 밥을 챙겨 먹고 설거지를 한다. 빨래를 갠 후 요가를 갔다가 돌아와 씻고, 잔다. 오늘 하루 종일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탈탈 털렸지만 할 일은 또 해야 하니까. 몇 시쯤 잠자리에 들 수 있을지 머릿속 시계를 가늠하던 그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신발이 참 예뻐요


엄마보다 살짝 어린 나이 지긋한 여성이었다. 도시에서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었을 때 반가워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순수하게 길을 묻는 게 아니라면 답은 보통 정해져 있다. 종교전도, 상품 구매나 가입 권유 등 목적은 확실했다.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걸 딱히 즐기지 않는 나는 살짝 날이 선 눈을 장전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 여성분은 본인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당황했지만 그대로 보낼 수 없어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뒤통수를 향해 던지듯 말했다.     


"아 네;; 고맙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대가 없는 칭찬에 지쳤던 몸과 마음에 생기가 돌았다. 뭐지? 지친 나를 위해 하늘에서 보내준 할머니의 얼굴을 한 천사인가? 이런 어이없는 상상을 하며 집으로 가는 몇 미터 남지 않은 집으로 향하며 혼자 히죽히죽 웃었다. 횡단보도 앞에 설 때까지 한 없이 무거운 발걸음이 날개를 단 듯 가벼워졌다.  


가라앉은 기분을 끌어올릴 때 쓰는 명약이 있다. 가장 쉬운 건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며 멍을 때리는 거다. 그게 안 먹히면 모든 폭풍우가 다 지나가고 홀가분한 기분을 안고 집에 가서 먹을 맛있는 걸 생각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건 문제의 중심에 있을 때의 대처법이고, 백설기에 박힌 검은콩처럼 앞으로 시작될 하루 중 문제가 콕 박혀 있을 걸로 예상되는 아침이면 대처법도 달라진다.      


전장으로 향하는 장수처럼 든든한 무기를 쥐고 집을 나서야 한다. 그럴 때 내가 자주 택하는 건 존재 자체로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빨간색 에나멜 플랫슈즈를 신는 거다. 언젠가 프렌치 시크 무드를 모은 사진 속에서 처음 그 신발을 봤다. 호리호리한 몸에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 하얀 발등이 드러나는 빨간 플랫 슈즈를 신고 바람에 날아가듯 가볍게 걷는 모습을 닮고 싶었다. 그 열망을 담아 얼마 후 비슷한 모양의 빨간 플랫 슈즈를 샀다. 경기도 변두리에 사는 나는 마음만은 옆구리에 바게트를 끼고 프랑스 파리 센 강변을 걷는 기분으로 빨간색 마법 신발을 신는다. 주로 청바지에 스프라이트 티셔츠, 아니면 소매를 둘둘 말아 올린 하늘색 셔츠와 함께한다. 그렇게 5개가 넘는 빨간 플랫 슈즈가 내게 왔다가 가고, 다시 후임이 들어왔다.  

    

존재감이 남다른 빨간 에나멜 플랫슈즈. 그래서일까? 그 신발을 신을 때마다 칭찬을 듣는다. 신발이 잘 어울린다는 그 한마디가 가라앉은 기분을 끌어올린다. 바닥난 에너지를 채워준다. 그래서 불안하고 눈앞이 캄캄한 날에는 일부러 빨간색 에나멜 플랫 슈즈를 찾아 신는다. 비상약처럼 언제 어떻게 필요할지 모르니 신발의 컨디션도 잘 체크해 둔다. 바닥이 닳진 않았는지, 구멍 난 곳은 없는지, 지저분하게 묻은 건 없는지 확인한다. 신발이 너덜너덜해지면 그간 내가 발로 먹는(?) 마음 안정제를 많이도 먹었구나! 가늠한다. 그래서 해진 신발을 쓰레기통으로 보낼 때는 감사의 인사를 한다. 나와 함께 해줘서 고맙다고, 덕분에 비뚤어지지 않고 힘을 내서 살 수 있었다고 마지막 인사를 건넨 후 쓰레기통에 넣는다.      


내게 빨간 에나멜 플랫 슈즈가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운을 주는 마법의 묘약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잘 어울리는 아이템을 착용했을 때 콕 짚어 얘기해 준다. 립스틱 색깔이 참 잘 어울려요. 안경 쓰니까 분위기가 확 달라요. 핑크색 스웨터를 입으니, 얼굴에 형광등 켠 거 같아요. 빨간 에나멜 플랫 슈즈를 신을 때마다 내가 들었던 칭찬이 내 어깨를 봉긋 솟게 해 준 것처럼, 누군가에게도 그런 기분을 전염시키고 싶어 진심을 담은 헤픈 칭찬을 쏟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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