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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May 24. 2023

<브리치즈 파스타>를 만들며 생각한 것들

좋은 결정의 시작은 좋은 컨디션

올리브유가 똑 떨어져 향한 백화점 식품관. 원하는 브랜드의 올리브유를 집어 계산대로 향하던 중 습관처럼 치즈 코너 쪽으로 일부러 돌아갔다. 꼭 살 게 있어서가 아니라 무슨 치즈가 나와 있나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그곳에서 우연히 할인가 5천 원에 파는 브리치즈를 본 게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언젠가 해 먹어 보고 싶은 음식 리스트에 <브리치즈 파스타>가 있었다. 밤마다 ‘잘 자요 ‘를 부르짖던 어느 가수의 레시피로 유명해진 음식. 방울토마토와 마늘, 생바질 잎을 올리브유와 후추, 소금을 넣고 버무린 후 삶은 파스타 면을 넣고 아직 파스타가 간직한 열기로 브리 치즈를 녹이는 묘한 조리법이었다. 초록 바질, 빨간 토마토, 하얀 브리치즈까지 뭔가 입으로 한여름의 이탈리아를 먹는 기분이 아닐까? 하지만 그 조합이 만들어 낼 최종 맛을 상상하니 샐러드라고 하기에는 뜨듯하고, 파스타라고 하기에는 미지근해 보였다. 대체 무슨 맛일까?      


세일하는 브리치즈를 보는 순간 호기심이 발동했다. 멀지 않은 허브코너에 생바질까지 있으니 모든 준비는 끝났다. 계획에도 없던 브리치즈와 생바질 잎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파스타를 먹기 좋은 때가 있다면 아마 점심이 아닐까? 아침은 부담스럽고, 저녁은 가벼운 느낌이라 점심이 적당하다. 적어도 내게는. 파스타 삶을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물이 끓기 기다리며 방울토마토와 바질잎을 씻어서 잘랐다. 마늘을 다지고, 브리치즈도 작게 잘랐다. 그걸 다했는데도 여전히 물이 끓지 않았다. 큼지막한 볼에 다진 마늘을 넣고 올리브유 두 바퀴를 둘렀다. 그리고 방울토마토를 넣어 잠시 재웠다. 썼던 도마와 칼을 다 정리했을 때 드디어 물이 끓었다. 소금 한 꼬집과 올리브유 몇 방울을 넣고, 푸실리 면도 넣었다. 앞으로 8분을 기다려야 한다. 파스타면이 익기를 기다리며 브리치즈 파스타를 만들었던 블로거들의 포스팅을 다시 훑어봤다. 빠진 재료는 없는지, 요리 순서가 뒤바뀌진 않았는지. 나는 대체로 잘 지키고 있었다. 자신감이 풀충전 됐을 때, 8분을 맞춰둔 핸드폰 시계 알람이 울렸다.      


면을 다 건지지 않고 뜨거운 채로 바로 부재료들을 담아둔 볼로 옮겼다. 그런데 생각보다 치즈는 꼿꼿하게 자기 형태를 유지했고, 좀처럼 재료들과 섞일 기미가 안 보였다. 너무 물기가 없어서 그런가 싶어 아직 김이 하얗게 오른 면수를 한 국자 떠서 재료 위에 끼얹었다. 뜨거운 면수와 함께 솜사탕 녹듯 스르르 녹을 줄 알았던 브리치즈. 일제 강점기에 독립투사로 태어났으면 훈장감이다.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물리력을 동원할 차례다. 요리 스푼을 이용해 휘적휘적 뒤섞었다. 초록색 바질은 숨이 죽어 얼굴빛이 거무죽죽했다. 내가 상상한 건 치즈가 녹아 크리미한 분위기에 중간중간 초록 바질과 빨간 방울토마토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풍경이었는데 망했다. 설렁탕 국물이 발목까지 찰랑이는 그릇에 토마토와 죽상이 된 바질이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비주얼이 별로라도 맛이 있으면 절반은 성공이 아닐까? 기대를 하며 맛을 봤다. 음... 이거 뭐지?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마늘향은 약하게 나는데 면수가 스치듯 안녕한 맛?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이럴 때는 만능 해결책을 소환한다. 내가 요즘 애용하는 해결책은 참치액이다. 뭐든 부족한 간을 부담스럽지 않게 채워준다. 아니나 다를까 참치액 몇 방울에 숨이 끊어져 가던 브리치즈 파스타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신문물 <브리치즈 파스타>를 맛보라며 모셔 온 오늘의 손님, 엄마와 작은 언니의 평가가 궁금했다. ’좀 건강한 맛이야‘, ’나도 처음 만들어 보는 거라 이게 맞는 맛인지 모르겠어’라고 밑밥을 두껍게 깔았다. 맛을 보는 두 사람의 얼굴을 힐긋 훔쳐봤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지, 각자 개인 접시에 수북하게 덜어 먹는다. 의아했다. 이게 괜찮은 맛인 거야?     


 인후염이라고 했지? 지금  후각도 미각도  정상이 아니라 그래.  좋은데?

 간도 잘 맞고, 뭘 더 안 넣어도 괜찮아.”     


아. 맞다. 나 인후염이지. 목이 땡땡 붓다 못해 잇몸도 여기저기 벗겨지고, 부어올랐다. 코도 맹맹하고, 뭘 삼킬 때마다 목을 찢는 듯한 고통이 몰려온다. 정상 컨디션이 아닌 상태다 보니 먹는 거 자체가 고통이고 뭘 먹어도 무슨 맛인지를 모른다. 그런데 한 번도 먹어 보지 않은 새로운 음식을 만들다니 브리치즈는 위험한 음식이었다. 엄마와 언니, 두 사람이 말끔하게 비운 접시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맛이 없는 게 아니구나. 만든 성의를 봐서 좋게 칭찬해 주는 말이 아니었구나. 다만 내가 정상 컨디션이 아니라 내 입에만 이상하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먹을 만한 음식을 만들었구나.

      

제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기 위해 좋은 컨디션 유지가 필수다. 정상 컨디션이 아닐 때,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은 미루기로 한다. 시간에 쫓겨 분위기에 취해 엉뚱한 선택을 하지 않기 위해 변명의 여지없는 완전한 100%의 컨디션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 매일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크건 작건, 중요하건 사소하건 많은 결정이 나를 기다린다. 쏜 화살처럼 돌이킬 수 없는 선택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나를 챙기고, 떨어진 컨디션을 끌어올린다. 약 챙겨 먹고, 걷고, 또 운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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