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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May 30. 2023

2000년대 조국을 이끌어갈 어린이의 오늘은?

상장의 흔적 

오래된 책장을 버리고 새 수납장을 들이면서 외면해 왔던 묵은 짐들과 마주했다. 누가 줬는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이의 명함부터, 첫 유럽 여행의 설렘이 담긴 파리 지하철 티켓까지 튀어나왔다. 괜히 추억 여행하다 밤샐 거 같아 미련 없이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단호하게 버리지 못해 먼지들과 함께 쌓아 두었던 짐 중 단연 빛나는 건 상장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받았던 상장 뭉치. 성인이 되고 보니 발에 채는 게 반장이고, 회장인데 나는 그런 임원 언저리에 가지 못했던 조용한 어린이였다. 공부도 고만고만, 성격도 그냥 그냥. 키가 작아 거의 맨 앞줄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거 빼고 딱히 특색도 존재감도 없던 무색무취 공기 같은 아이였다.   

   

공부는 기본, 리더십과 품행까지 골고루 갖춰야 하는 모범적인 어린이라면 벽을 도배하고도 남을 상장. 내 상장 뭉텅이들은 그다지 종류가 많지는 않았다. 맨 위에는 개근상장들이 있었다. 부모님 모두 일을 하시니 집에 돌봐줄 사람이 없어 아파도 걸을 힘만 있으면 학교 가서 아파야 했던 강한 자만이 살아남던 그 시절. 성실의 지표였던 개근상은 내가 타 올 수 있는 몇 안 되는 상장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개근거지’라는 말로 체험학습 신청서를 내고 여행 갈 형편이 되지 않는 아이들을 비하하는 표현의 근거가 됐다고 했던가? 그 뉴스를 떠올리니 씁쓸함이 몸과 마음에 먹물처럼 퍼졌다. 씁쓸한 기분을 뒤로하고 다음 장을 넘기니 표창장이 나왔다. 그리고 테두리가 누렇게 바랜 상장 안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위 어린이는 두서와 같이 생활 태도가 타의 모범이 되어
2000년대의 조국을 이끌어갈 유능한 인재로 기대되기에 이를 표창합니다.      


이것도 공부나 음. 미. 체의 월등함을 칭찬하는 상장은 아니다. 착한 일을 하면 주는 ‘착한 어린이표‘를 마일리지처럼 쌓으면 주는 상이다. 성적으로는 승산이 없으니 그런 쪽으로 상장을 노리는 게 내 방식이었다. 그 외에 미술상, 과학상 상장이 1종씩 있었다. 글과 말을 다듬어 평생 먹고사는 중인데 글쓰기 관련 상장이 하나도 없다니 이렇게 인생은 알 수 없다.         


2000년이 시작한 지도 23년이 지났는데 조국을 이끌어 갈 유능한 인재로 기대를 받았던 어린이는 자라, 그럭저럭 사는 중이다. 90년대 후반이었던 당시, 초등학생은 2000년대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상장 안의 2000년대의 내 모습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2000년대에는 자동차가 하늘을 날 줄 알았는데 여전히 러시아워가 되면 도로는 꽉 막히고 사람들은 줄지어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오르내린다.      


딱히 뭐가 되고 싶지도, 뭘 하고 싶은지도, 뭘 잘하는 지도 몰랐던 그때는 학교를 졸업하면 막연히 회사원이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장래희망이나 꿈을 물어보는 어른이 제일 싫었다. 하지만 나도 그저 그런 어른 중 하나가 됐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얼마 전 가족 모두가 함께 갔던 반나절 캠핑에서 조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려다가 꾹 참았다. 내가 제일 싫어했던 질문을 하는 똑같은 어른이 되는 게 싫었다. 의지와 달리 주책없이 벌어지는 입에 억지로 노릇노릇하게 구운 장어를 밀어 넣었다.  


2000년대의 조국을 이끌어갈 유능한 인재로 기대되는 어린이는 자라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결국 꼰대인 어른이 됐다.  어른이 되고 보니 아이들에게 왜 꿈이나 장래 희망을 묻는지 이해됐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에게 반쯤은 진짜 요즘 애들은 뭐에 관심 있는지 궁금해 서고, 절반은 할 말이 없어서다. 할 말이 없을 때는 굳이 뭔가를 말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했던가? 이 진리를 깨닫게 한 많은 흑역사들을 곱씹으며 겨우 입단속 했다. 물어보지 않았는데 굳이 조언이나 충고를 해주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꼰대라고 한다는 요즘 것들의 말을 머리에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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