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8식을 향해 달려간 시간들
나의 여행이 늘 그렇지만 즉흥적이다. 일반 직장인처럼 장기 플랜을 짤 수 없는 프리랜서의 삶 그러하다. 여행을 가기 위해 시간을 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있을 때 여행을 가지 않으면 평생 갈 수가 없다. 가고 싶은 여행지 리스트 상위권에 늘 랭크되어 있는 홋카이도를 가게 된 것도 불과 약 일주일 안에 모든 걸 결정하고 정리하고 떠났다. 겨울이고 여름이고 늘 (나의 일본 비행기표 값 상한선 상) 비싸기만 했던 비행기표도 저렴했고, 숙소도 성수기에 비해 거의 반값에도 못 미쳤다. 기회는 이때였다. 블로그도, 여행책에도 기대지 않고 그저 하고 싶은 Do it List만 만들어서 떠났다. 길은 구글맵이 알려줄 거고, 음식점도, 카페도, 다 구글맵神이 다 해주시니까 그분만 믿고 떠났다.
여행 전, 여행 동반자와 나눈 카톡대화 중
6일간의 홋카이도를 다녀온 후 알게 되었다. 3월의 홋카이도가 왜 저렴한지를... (눈이 녹기 시작하면서 거리 자체가 질퍽질퍽, 방수 신발 없이는 정상 도보 불가) 하지만 오직 먹부림이 목표라면 가성비 최고의 시즌이 아닐까 싶다. 관광객도 비교적 적고, 소문난 식당들의 웨이팅도 적고, 좀 우중충 하긴 하지만 한적한 홋카이도를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간인 것은 분명하다.
사실, 홋카이도란 곳이 1일 3식이 아닌 1일 8식을 해야 정복 가능한 곳이라는 점이 떠나기 전에는 몰랐다. 결론적부터 말하면 나는 1일 8식에 반도 못 따라갔다. 아직 못가 본 곳, 못 먹은 것이 너무 많아 여름날에 다시 홋카이도로 떠날 마음을 먹게 했다.
혹시라도 나처럼 준비 없이 떠나고 싶은 예비 홋카이도 여행자들에게 조금이나마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그리고 막연히 홋카이도의 식문화에 대해 상상하고 있을 분들을 위해 몇 자 적는다.
나를 흥분케 한 홋카이도의 맛 ① 삿포로 홋카이도대 근처 Kiiroitamanegi(黄色いたま葱) 함박 스테이크
앞선 글에서도 살짝 언급했지만 대학가는 전 세계 어디나 저렴하고 양 많고 맛있는 음식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숙소가 있는 스스키노 역 근처에도 소문난 음식점들이 많지만 그곳들을 뒤로하고 홋카이도 대학교 근처의 작은 가게로 향한 건 오직 구글맵의 평 때문이었다.
노부부 운영+정성이 묻어나는 음식+여기의 엄마는 본인이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귀엽... 얼마나 귀여우신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오픈 시간인 오전 11시 30분보다 조금 이르게 도착해 가게 밖 사진을 찍고 있으니 드르르 문이 열린다. 구글맵 리뷰 속 그 할머님이시다. 우리를 향해 들어오라고 손짓하시는데 좀 놀랐다. 보통의 일본 음식점들은 오픈 시간에 칼같이 문을 열기 때문에 미리 도착해도 좀처럼 안으로 안내하는 경우가 드물었던 경험들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다찌 테이블까지 포함해서 10석 정도 될까 말까 하는 작은 공간이 보인다. 주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양의 밥과 뜨거운 철판 위에 소스가 넉넉하게 담긴 함박스테이크가 내 앞에 세팅되었다. 거의 수프 수준의 넉넉한 소스를 떠서 한 입 맛을 보니 깊고 진한 향신료의 맛 위로 함박스테이크에서 우러나온 육즙 맛이 느껴진다. 피망, 단호박, 가지, 감자, 당근 등 곁들인 가니쉬 신선한 본연의 맛이 느껴졌다. 홋카이도대를 구경하느라 꽁꽁 얼었던 몸이 스르르 녹는다. 흔히 먹는 토마토 스튜의 맑은 버전 맛이다. 함박 스테이크도 잡내 없이 깔끔한 맛이었다. 동행은 간장 베이스 소스가 곁들여진 와풍(和風) 함박스테이크를 시켰는데 그것 또한 특색 있고 정성이 묻어나 보였다.
허겁지겁 먹고 있으니 할머님께서 말씀을 거신다. 밥 더 줄까? 너 이 학교 다니니?라고 일본어로 자꾸 물어보시는데 우리 일행은 일본어를 살짝 알아듣는 정도지 긴 대화가 불가능한 수준이다. 다행히 옆 테이블의 중년 여성 손님께서 영어로 말씀해주셔서 어렵게 어렵게 대화를 이어갔다. 관광객이 여길 어떻게 찾아왔을까? 의아해하는 할머님에게 구글맵을 보고 찾아왔다고 했더니 “스고이(대단해)~ 여보 구글맵을 보고 왔대”라며 신기함에 마스터 할아버지께 고스란히 우리의 대화를 전하셨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채 5평도 되지 않는 가게라 할아버지도 분명 들으셨을 텐데 말이다. 역시 귀여운 할머님임에 틀림없다. 화려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맛과 분위기 대신 시골 할머니가 만들어주시는 것 같은 푸짐하고 넉넉한 맛으로 든든하고 기분 좋게 점심을 해결했다.
나를 흥분케 한 홋카이도의 맛 ② 비에이 +후라노 버스 투어 중 감자 & 버터
비에이 버스투어는 참 여러 여행사가 운영하고 있다. 그중에서 내가 Y여행사를 선택한 이유는 현지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회사라는 점도, 홋카이도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에 지점을 가지고 있는 여행사라는 점도 큰 작용을 하지 않았다. 다만 3월까지만 진행되는 청의 호수 라이트업 일정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50% + 여행 일정 중 홋카이도산 감자 & 버터 무제한이라는 문구가 50% 정도 작용했다. 삿포로 시내를 떠난 후 한 번의 휴게소 다음의 일정으로 플라워 랜드에 들렀다.
한겨울이라 끝없이 펼쳐진 눈밭 외에는 그다지 볼 것이 없는 그곳의 목적은 오직 무제한 감자! 내리자마자 참석자들에게 감자 한 개와 버터 하나, 우유 한 컵을 제공한다. 모두 홋카이도 산이라고 한다. 뜨끈한 감자 위에 버터를 올려 한입 베어 무니 진하고 고소한 버터의 향이 어우러진 달달한 감자의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이래서 홋카이도산 감자, 감자 하는구나! 감자를 늘 소금,이나 설탕을 찍어 먹는 것 외에 시도할 생각을 못했는데 감자와 버터의 조화는 예상 밖이었다. 홋카이도산 감자를 무제한으로 제공한다는 솔깃한 문구에 혹했지만 사실 생각만큼 많이 먹지 못했다. 한 번 더 리필하는 것으로 나만의 홋카이도 감자 대첩은 막을 내려야만 했다. 감자는 쉽게 포만감을 불러왔고, 풍미를 더해준 버터는 존재감이 확실했지만 그만큼 쉽게 물린다. 무제한의 설렘은 포만감 앞에 무너졌다. 그래도 지금까지 먹었던 감자들보다 감자의 향이 짙고 감자 자체의 밀도도 높은 편이라 홋카이도 감자의 유명세가 괜히 생긴 게 아니구나 절실히 깨달은 시간이었다.
이 감자의 감동 때문에 매일 밤 벌이는 맥주 파티의 안주로 북해도 한정 각종 감자 과자들이 늘 함께 했다. 덕분에 다음날 아침 퉁퉁 부울 수 있지만, 방법은 있다. 짭짤한 감자 과자와 맥주를 다 먹고 나서 홋카이도산 우유를 마시면 붓기 방지가 가능하다. 훗훗! 이것이야 말로 맛과 사진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여행객의 진정한 준비 자세가 아닐까?
+ 감자는 무제한이었지만 버터와 우유는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나를 흥분케 한 홋카이도의 맛 ③ 삿포로 클래식 맥주
일본 여행의 묘미는 뭐니 뭐니 해도 그것이 아닐까? 매일 밤 숙소에 들어오면 마트나 편의점에서 털어 온 다양한 맥주를 마시며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일본 심야 예능을 보며 잠드는 일! 지역별, 시즌별로 다양한 한정 제품이 나오는 맥주의 천국, 일본을 즐기는 방법이다.
삿포로에 왔으면 삿포로 한정 맥주를 마시는 게 인지상정! 음식점에서는 생맥부터 병맥으로, 숙소에서는 캔맥으로 매일매일의 마무리를 삿포로 클래식과 함께 했다. 지역 한정이라는 다른 맥주들도 마셔봤지만 삿포로의 눈처럼 깔끔하고 시원한 맛과 목 넘김이 내입에 딱이었다. 아마 시간이 지나도 홋카이도 여행의 기억은 삿포로 클래식의 맛으로 기억될 것 같다. 한국에 돌아오고서야 삿포로 맥주 박물관에 갔을 때, 삿포로 클래식 로고가 박힌 맥주 컵 하나 사 오지 못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한국에는 삿포로 클래식 맥주가 없으므로 아무 맥주를 따라 넣고서라도 2018년 3월, 홋카이도의 늦은 겨울밤마다 마셨던 그 맥주를 추억할 걸... 게으른 여행자는 뒤늦은 후회를 여행 기념품으로 가져온다.
+ 소소한 팁이라고 한다면 무겁게 미리 시내에서 쇼핑해 들고 오는 것보다 간편하고 저렴하게 신치토세 공항에서 수속 다 마치고 면세 구역에 들어와 구매하시는 걸 추천! (같은 비행기에 타신 한 분은 24캔짜리 한 박스를 구매하시는 걸 목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