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화목함을 살 순 없지만 돈을 쓰면 화목해지는 진리
본격 장마가 시작된 후 내 몸의 모든 땀구멍에서 땀이 뿜어 나온다. 습도와 온도는 불쾌지수를 높이기 딱 좋다. 온종일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로 너덜너덜해진 몸을 이끌고 집 현관문을 순간 뜨겁고 습한 기운이 얼굴에 닿는다. 동시에 짜증 가득한 내 목소리가 거실에 퍼진다.
에어컨 좀 켜고 살자아아아
거실 구석에 10년도 넘은 스탠드형 에어컨이 하나 있다. 그걸로 우리 가족은 여름을 난다. 이 녀석이 활동하는 기간은 1년 중 단 두 달, 7월과 8월뿐이다. 6월 기온이 아무리 뜨거워도 절대 켜는 일은 없다. 그마저도 가족 과반수가 집에 있어야만 켠다. 엄마 혼자 집에 있을 때는 뜨거운 바람이 나오는 선풍기로만 무더위를 견딘다. 에어컨 바람을 싫어하는 엄마에게 매년 여름, 전기세 폭탄을 앞세워 언론에서 떠드는 소리는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왔을 때 밖보다 습하고 뜨끈한 공기로 가득 차 있는 걸 느끼는 순간 짜증이 폭발한다. 작은 일에도 날을 세우고, 투닥이게 된다. 발에 걸리는 잡동사니에 화풀이하게 되고, 안 부리던 투정까지 쏟아진다. 이건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니다. 엄마 vs 아빠, 엄마 vs 나, 엄마 vs 동생, 동생 vs 아빠, 아빠 vs 나까지 1:1이 될 때도 있고, 1:다수로 붙기도 한다.
언젠가 작은 언니와 함께 엄마를 모시고 점심을 먹던 날. 여름이면 반복되는 싸움 소식을 전하니 언니가 말했다.
형부가 그러더라, 가족끼리 짜증 내지 말고 몇만 원 전기세 더 내고 그냥 에어컨 틀자고.
쾌적하면 싸울 일 없다고.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화목함은 돈으로 살 순 없지만 돈을 쓰면 화목해질 순 있다. 수없이 얘기해도 엄마는 강경했다. 에어컨을 틀면 큰일이라도 나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렇게 아끼면 뭐 할까? 아빠는 늘 밤새 티브이를 틀어 놓으니 전기세가 줄줄 새는데... 언니와 합세해 엄마를 설득했다. 여름 전기세 나오는 거 내가 낼 테니 아끼지 말고 에어컨 켜고 화목한 분위기로 살자고. 그날 이후 엄마는 가족들이 집에 들어오는 시간에 임박해서야 에어컨을 켠다. 여전히 바로 직전에 공기에 습기를 살짝 걷어내는 정도지 ‘파워 냉방’은 시도하지 않는다. 결국은 돈의 문제였다. 난 돈을 잃고 쾌적함을 얻었다.
예전보다 기온이 높아지기도 했고, 그걸 에어컨 없이 견디기엔 내 체력도 인내심도 바닥났다. 지구 오존층 파괴의 주범으로 찍힌 프레온 가스 발생을 나 하나라도 줄여 보자는 알량한 정의감 충만해 에어컨을 최대한 켜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폭발하는 짜증 지수로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이 되지 않기 위해 눈을 딱 감고 에어컨을 켠다. 에어컨 바람에 길들여진 사람에게 선풍기는 보조일 뿐이다. 선풍기는 에어컨을 대체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인류 최대의 발명은 스마트폰 다음이 에어컨이다. 매년 여름, 에어컨을 발명한 '윌리스 캐리어' 박사를 향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에어컨을 켠다. 지구도 물론 걱정되지만 일단 여름에는 지구 걱정은 잠시 접어둔다. 내 가정의 평화를 위해 그리고 내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 에어컨을 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