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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ul 10. 2023

망고매직

잘 살고 있다는 기분 충전이 필요할 때는 망고

여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몇 개 있다. 하얗게 부서지는 바다의 파도, 숱이 빽빽한 머리칼처럼 가지마다 빈틈없이 꽉 찬 초록잎, 정수리를 뚫을 거 같은 햇빛 등등이 머릿속을 스친다. 여름은 각종 과일과 채소가 넘쳐 나지만 그중에서 내가 사랑하는 건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수박이다. 겨울의 사과, 봄의 딸기를 먹어 치운다면 여름에는 수박을 숨 쉬듯 먹는다. 옹졸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대범한 스케일, 보통 과도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 듬직한 기세, 한입 베어 물면 수도꼭지라도 열어 놓은 듯 콸콸 쏟아지는 과즙까지... 수박은 그 자체로 여름의 아이콘이다.         


하지만 이번 여름, ‘최애’ 과일의 왕좌가 바뀌었다. 수박도 먹긴 먹지만 빈도와 만족도를 따졌을 때 망고가 신흥강자로 떠올랐다. 올여름 첫 빙수는 망고 빙수였다. 달콤하고 향기로운 망고 빙수를 먹으러 오래전 대만 여행의 추억을 떠올렸다. 파파야, 두리안처럼 이름은 알지만 쉽게 맛볼 수 없는 열대 과일 중 하나였던 망고를 본격적으로 처음 먹어봤다. 그전까지 망고 퓌레가 들어간 망고 음료나 젤리 같은 가공식품만 먹다가 과육이 살아 있는 망고를 먹은 건 대만이 처음이었다. 당시만 해도 빙수 하면 팥빙수가 전부인 줄 알았던 나는 망고 과육이 아낌없이 들어간 망고 빙수를 맛보고 잠시 천국에 다녀왔다. 아가미 호흡이 필요했던 습도, 처음 가보는 나라에 대한 긴장이 뒤섞여 한껏 예민해져 있던 몸과 마음이 망고 빙수 한 그릇으로 스르르 녹았다.     

 

망고매직 덕분일까? 그 후 망고 빙수는 대만을 기억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자, 한국에서도 기회가 되면 망고 빙수를 찾아 먹었다. 매번 과육을 넘치게 담아주던 대만의 망고 빙수를 기억하며 주문한다. 하지만 대부분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한국에서 대만에서 먹었던 넉넉한 인심의 망고 빙수를 만나기 힘들다. 작고 귀여운 망고 양에 실망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예 냉동 망고를 주문했다. 지갑 사정 때문에 생망고는 꿈도 꿀 수 없다. 어차피 냉동 망고를 먹을 거라면 원 없이 먹고 싶다는 욕망이 불타올랐다. 불과 하루 반나절 후 A등급 냉동 애플망고 다이스 1kg짜리 6 봉지가 든 아이스박스가 집에 도착했다.     


그날 이후부터 망고의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밥을 먹고 후식으로 망고를 먹고, 더위를 식히기 위해 망고를 꺼내 먹는다. 생망고를 첨가물 없이 얼렸다는 포장지의 제품 설명에 마음이 놓였다. 냉동식품이 몸에 좋지는 않겠지만 액상 과당이나 인공첨가물 가득한 청량음료나 아이스크림보다는 뭐라도 낫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생각으로 불안한 마음을 다독이며 냉동 망고를 먹는다.     


최근 급변하는 기후변화의 여파로 이제 우리나라에는 ‘장마’란 단어가 퇴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던가? 한국의 7월은 대만 못지않은 습기와 무더위에 숨이 턱턱 막힌다. 장마 대신 이제 우기로 불러야 할 날씨에 유일한 희망은 냉동 망고다. 숨만 쉬어도 내 몸의 모든 땀구멍에서 땀이 삐져나오는 계절 여름. 하루 동안 찌든 땀과 피로를 샤워로 씻어 낸 후,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의 물기만 겨우 닦아 낸 후 선풍기 앞에 앉는다. 집에 들어서면서 켜 놓은 에어컨은 샤워하는 사이 한증막 같던 집안을 금세 적당한 온도와 쾌적한 습도로 바꿔 놓았다. 머리카락을 선풍기 바람에 말리며 살짝 녹은 냉동 망고를 포크로 집어 입에 넣는다. 입 안에서 망고를 굴리며 구석구석 망고 칠을 한다. 달콤하고 향긋한 망고 향과 맛이 입안에 퍼진다. 그러면 기분은 금방 망고처럼 쨍한 노란색으로 변한다. 시커먼 불안, 씁쓸한 현실이 스르르 녹아 사라진다.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비록 냉동이지만) 망고를 먹는 삶이라니... 특급 호텔의 생망고 빙수를 먹는 사람들에게는 이게 뭐 대단하냐 싶겠지만, 1kg에 6,700원짜리 냉동 망고 하나로 가성비 좋은 행복을 누린다. 한 땀 한 땀 보면 여전히 우당탕이지만, 나 제법 잘살고 있다는 기분이 차오른다. 내일도 땀과 피로에 찌들겠지만, 집에 돌아오면 냉동고 가득 냉동 망고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흐물거리던 도가니에 힘이 들어간다. 내일은 내일의 망고가 기다리고 있으니, 피로와 스트레스로 승천하는 승모근도 웃으며 내릴 수 있다. 이게 바로 망고의 기적이자 망고매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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