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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ul 19. 2023

등산 후 스크럽

끝이 좋아야 좋은 거니까

루틴 짜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산에 오르기 전부터 산에서 내려와 할 일을 순서대로 머릿속에 정해둔다. 코스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하산 루트 끝에 괜찮은 카페가 있다면 그곳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게 있다. 땀에 찌든 몸과 마음을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식힌다. 습기 없이 쾌적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굳이 싸 짊어지고 간 책을 읽으며 에너지를 충전하고 나면 집으로 향한다. 집에 오면 썼던 등산 장비들을 정리하고, 흙먼지 가득한 옷을 세탁기에 넣는다. 그리고 샤워를 한다. 온종일 쏟은 땀과 뒤집어쓴 먼지 때문에 한 번에 거품이 팍팍 나지 않는다. 두 번의 샴푸나 비누칠 끝에 말끔하게 씻고 나면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 기다린다. 소금으로 된 바디 스크럽 제품을 몸에 치덕치덕 바르고 조심조심 문지른다. 묵은 각질이 벗겨지고, 오일막 코팅이 된다. 제법 매끈해진 피부와 기분으로 욕실을 나온다. 등산의 마무리는 하산이 아니라 스크럽이다. 이 루틴을 만들고 나니 스크럽을 하고 싶으면 등산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그냥 스크럽을 할 수도 있지만 왜인지 등산을 하고 스크럽을 해야 기분이 200%는 더 개운해지는 느낌이다.      


불쾌지수가 폭발하는 장마철이라 그럴까? 기분이 오락가락한다. 그래서 요즘 새로 새운 내 목표는 기승전’기분 좋아지기‘다. 엔딩이 좋아야 모든 게 좋다고 여기는 마인드 때문에 과정의 99%가 난리 전쟁통이어도 끝에 1%가 좋으면 좋은 걸로 끝난다. 그래서 마무리는 무조건 기분 좋아지는 각종 방법을 총동원해 배치한다. 등산 후 스크럽을 하는 것처럼 불덩이를 쥐고 저글링 하듯 동동거리며 하루를 보내고 나면, 저녁 시간은 오직 좋아하는 일들로만 채운다. 종일 ’ 주문받은 일‘을 마무리하고 나면, 집 밖으로 나간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여전히 뜨거운 열기가 운동화 밑창에서부터 느껴지지만 그래도 한 번씩 훅 부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기분 좋게 산책한다. 여유가 있으면 커피 한잔을 하고 오고 아니면 곧장 집으로 온다. 손을 씻고 냉장고부터 열어 속사정을 스캔한다. ’ 냉털‘을 위해 냉장고 속 재료들을 이리저리 조합해 내 취향의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쟁여두기 계의 일인자, 엄마의 꽉 찬 냉장고에서 빈 곳이 보이면 내 숨통까지 열리는 기분이다. 식사 후에는 냉동 망고를 꺼내 아이스크림 삼아 아작아작 씹어 먹는다. 내가 있는 여기는 분명 한국 경기도지만 눈감고 망고를 먹고 있으면 이 공기와 습기 정도면 동남아의 어느 리조트에 와 있는 착각에 빠진다. 설거지 후, 요가 수업에 간다. 땀을 쫙 빼고 돌아와 샤워한다. 화장품을 찹찹 바른다. 끈적이지 않도록 최대한 많이 두드린다. 어느 정도 화장품이 피부에 스며들면 머리를 말린다. 뜨거운 바람으로 두피를 바짝 말리고, 찬 바람으로 머리끝을 말린다. 보송하게 머리가 마르면 침대에 대자로 눕는다. 얼마간 뒤적거리다 잠이 든다.      


악덕 빚쟁이에게 쫓기는 채무자처럼 종종거리며 산다. 일과 시간의 나는 무능함을 마주한다. 죄책감이라는 이자에 허덕이지만, 일의 셔터를 내리고 나면 ’ 내일의 나’에게 일단 모든 일을 미룬다. 일과가 끝나고 나서 괴로워한다고 내일 그 일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니, 눈을 감는다. 내일의 내가 어찌어찌해 낼 게 분명하다는 걸 아는 짬이라 다행이다. 전쟁 같은 하루를 보냈는데 그 꾸질꾸질한 기분을 안고 나의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소진한 에너지는 오늘 채워야 내일 또 시작될 엉망진창 하루를 견뎌낼 수 있다.   

  

남의 기분을 챙기다가 내가 망가지는 걸 모르고 살았다. 눈치 보느라 쭈구리로 살았던 지난날의 나에게 사과하는 방법은 앞으로 내게 주어진 날들만큼은 눈치 보며 쭈굴쭈굴하게 살지 않는 방법뿐이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기쁨이처럼 온종일 해피할 수 없으니, 하루의 1/4 정도는 내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 시간을 쓴다. 기분을 다운시키는 것들은 최대한 거리를 두고, 기분 좋아지는 것들로만 촘촘히 채워둔다. 내 기분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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