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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Sep 14. 2023

장비병 탈출 넘버원

작은 실패가 몰고 온 결과 

세상 모든 새로운 것 앞에 겁부터 내는 나지만 음식 앞에서만큼은 ’특급 용감이‘가 된다. 관심의 레이더망에 들어오면 두려움 없이 먹는다. 처음 그릭 요거트를 먹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릭 요거트 열풍이 한창이던 그때, 기존에 먹어왔던 요거트랑 뭐가 다를까? 궁금했다. 우연히 들어간 카페의 메뉴판에서 그릭 요거트볼을 발견한 후 반가움에 깨춤을 추며 주문했다. 잠시 후 그릇에 담긴 그릭 요거트가 당도했다. 그릭 요거트 위에 그래놀라와 블루베리, 키위가 덮여 있고, 반짝이는 꿀이 뱅그르 둘러 있었다. 화려한 토핑을 슬쩍 걷어내고 순수한 그릭 요거트부터 맛봤다. 오! 흔히 먹던 요거트를 압축했지만 시큼한 맛없이 고소했다. 꾸덕한 질감의 요거트는 혀 위에서 부드럽게 녹았다. 건강한 것 치고 맛있기 힘든데 그릭 요거트는 뭔가 분명 맛있는데도 먹으면 건강해질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이 그릭 요거트를 매일 먹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시판 그릭 요거트의 경우 밥값에 버금가는 금액이 제일 큰 진입장벽이었다. 그릭 요거트볼은 든든했지만 극한의 다이어터가 아닌 나는 그 돈을 주고 밥 대신 사 먹기는 꺼려졌다.      


마트에서 2+1 스티커가 붙은 그릭 요거트를 만나면 주저 없이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마저도 아쉬워 인터넷에서 대용량을 구입해 먹었다. 1kg 수제 그릭 요거트를 주문할 때 배송비와 아이스팩 비용까지 추가하니 마냥 싼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신선식품이니 가공식품들처럼 2~3개를 한꺼번에 주문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따라오는 어마어마한 양의 플라스틱과 스티로폼 쓰레기는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릭 요거트는 일주일이면 뱃속으로 사라지는 데 따라온 쓰레기는 아마 내가 죽기 전까지도 썩어 없어지지 않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니 그릭 요거트 먹기가 점점 찜찜해졌다. 그런 마음 때문에 그릭 요거트를 포기하긴 아쉬웠다.      


덕후의 끝은 직접 만드는 거라고 했던가? 인터넷에서 그릭 요거트 만드는 법을 검색했다. 온라인 세상의 금손들은 ’쉽고‘, ’싸고‘, ’취향대로 꾸덕함 조절 가능‘이라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현실로 만들고 있었다. 소용량은 커피 필터로도 만들고 대용량을 만들려면 유청 분리기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었다. 거름망 위에 마시는 플레인 요거트를 붓고 하루 정도 냉장고에 두고, 유청이 빠지기를 기다린다. 어느 정도 빠지면 다시 압력을 더하는 스프링을 넣고 뚜껑을 닫으면 꾸덕함이 조절된다. 보통 2박 3일이면 꾸덕한 대용량 그릭 요거트가 탄생했다. 몇 번 ’유청 분리기‘를 검색하니 쓸데없이 친절한 알고리즘은 세상의 모든 종류의 유청 분리기 광고를 데려왔다. 플라스틱, 유리, 우유팩 모양, 밀폐용기 모양 등등 소재도, 생김새도 다른 유청 분리기의 신세계가 펼쳐졌다. 유청분리기만 사면 매일 그릭 요거트를 먹으며 건강하고 날씬한 사람이 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음에 드는 상품이 보일 때마다 야금야금 넣어 두니 장바구니가 꽉 찼다. ’유청분리기‘ 이상형 월드컵을 하듯 하나씩 삭제하다 4강쯤 됐을 때, 그릭 요거트 마니아는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걸 사면 과연 내가 몇 번이나 쓸까?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에도 자신을 설득시키지 못했다. 집 곳곳에 처박혀 먼지만 쌓여가는 운동 기구와 조리 기구가 눈앞에 스쳐 갔다. 조용히 쇼핑몰 창을 닫고 검색창을 열어 유청분리기 없이 그릭 요거트 만드는 방법을 찾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길을 먼저 개척하신 선구자님의 흔적을 발견했다. 나처럼 유청 분리기 구매 버튼을 누르기 직전 지름신을 물리친 역사가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준비물은 간단하다. 기름종이와 찜기만 있으면 가능! 고구마나 떡을 찔 때 쓰는 구멍이 뻥뻥 뚫린 스테인리스 찜기만 있으면 그릭 요거트가 탄생한다. 기묘한 조합으로 그릭 요거트를 만들 수 있다. 종이 포일 말고, 튀김이나 고기의 기름이 빠지도록 까는 기름종이를 찜기 위에 깔면 그럭저럭 유청 분리기 모양새를 갖춘다. 유청분리기와 마찬가지로 며칠 냉장고에 두고 유청을 빠지기 기다리면 됐다.        


두근두근 며칠을 기다려 드디어 수제 그릭 요거트가 완성됐다. 설렘을 가득 안고  스푼 가득 그릭요거틀 떴다. 그릭 요거트를 담은 그릇이 딸려 올라올 만큼 꾸덕하다. 일단 질감 합격. 그리고 스푼 가득 뜬 요거트를 입에 넣었다. 그동안 먹어 왔던 그릭 요거트처럼 부드럽고 신선했다. 하지만 문제는 산미. 유청을 빼는 과정에서 더 발효(?)가 돼서 그런 걸까? 아니면 하루에도 수없이 문을 여닫는 가정용 냉장고에서 온전한 휴식을 취하지 못했는지 새콤함이 진했다. 며칠 동안 기대감을 안고, 냉장고를 열 때마다 잘 만들어지고 있는지 눈으로 안부 인사를 건넸던 수제 그릭 요거트는 그렇게 처음이자 마지막 인사를 했다. 시판 그릭 요거트가 왜 비싼지 납득하게 됐다. 들이는 정성과 수고로움을 생각하면 자서 먹는 게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이득이었다.

     

평생 뜨거운 스팀 찜질만 했을 찜기가 그릭 요거트를 만드느라 생전 처음 냉장고에서 혹한 훈련을 했다. 고생한 찜기를 설거지하며 이번에 실패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청 분리기를 산다고 그릭 요거트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대용량 요거트를 사 와서 붓고, 기다리고, 설거지하는 똑같은 노동과 에너지가 든다. 이 정도의 수고로움이라면 처음 몇 번 신기함이 사라지고 나면 유청분리기 역시 싱크대 구석에 처박아 놓을 게 분명했다. 돈은 돈대로 나가고, 불필요하게 돈을 썼다는 죄책감은 1+1로 따라왔을 거다. 큰 투자 없이 작은 실패를 했기에 큰 실패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모든 실패는 실패로 끝나는 게 아니다. 실패가 경험으로 치환되는 순간 앞으로 내 삶의 실패 확률은 점점 줄어들게 분명하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됐으니 '유청 분리기 없이 그릭 요거트 만들기'는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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