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회복을 위해 끊어야 할 것들
옷감계의 개복치는 뭘까? 실크나 캐시미어 같은 고급 옷감은 조금만 관리가 소홀하면 쉽게 망가진다. 내 옷장에는 겨울철 코트나 패딩을 제외하고 드라이클리닝이 필요한 고급 옷이 없다. 대부분은 세탁기를 이용하고, 간혹 손빨래하는 게 최선의 노력이다. 지금보다 옷감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시절, 세탁 지시 사항이 붙은 라벨과 귀찮음 사이에서 방황했지만 언제나 승자는 귀찮음이었다. 번거로움을 피해 막대했던 옷은 상상치도 못한 몰골로 내게 다시 돌아왔다. 세탁을 마치고 나면 아동복 사이즈로 줄어들기 일쑤였다. 언젠가 겨울이면 유독 손이 많이 가던 울 소재 줄무늬 스웨터도 한껏 위축된 모습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비루한 몸을 구겨 넣어도 배꼽이 드러날 만큼 작아졌지만 헌 옷 수거함으로 보낼 수 없었다. 청바지에도 면바지에도 슬랙스에도 어울리던 그 녀석과 이별할 용기가 없었다. 곧바로 애착 니트를 심폐 소생할 방법을 찾아 SNS를 뒤졌다.
그곳에는 무수한 재야의 세탁장인과 살림 고수가 각자의 비법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섬유유연제나 린스, 트리트먼트 같은 모발용 제품을 미지근한 물에 풀어 조직을 유연하게 만든 후 늘리는 방법이 공통적이었다. 이 방법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을까 찾던 도중 유독 세탁에 진심이었던 한 살림 인플루언서는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집어줬다. 줄어든 니트를 원래 상태로 늘리기 위해서는 먼저 보풀 제거기나 일회용 면도기를 이용해 엉긴 채 수축된 섬유 조직을 끊어 주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물리적 마찰이 반복되면 섬유가 뭉치고, 그렇게 줄어든 상태에서 어르고 달래서 늘여도 이전처럼 돌아오기란 불가능하다는 설명이 붙었다. 그의 주장이 내 귀에는 일리 있게 느껴졌다. 린스 푼 물에 담그기 전, 먼저 거사를 진행했다. 정성스레 애착 스웨터를 면도했다. 기적처럼 늘어나길 바라며 곳곳에 붙은 보풀을 비롯해 전반적으로 면도한 덕분인지 세기말 Y2K 감성 넉넉했던 배꼽티 뺨치는 강제 크롭니트는 세탁을 마치자, 살짝 골반에 닿을 만큼 늘어났다.
아~ 먼저 끊어야 했구나!
원상 복귀를 위해 끊어야 했던 건 뭉친 섬유만이 아니었다. 지난 2023년은 단단하게 뭉친 고민과 걱정이 명치에 콱 박힌 것처럼 답답한 날들이었다. 이대로 있자니 암담하고 불안하긴 한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 아예 손을 놓고 멍청하게 바라보곤 했다. 온몸에 올가미라도 감은 듯 갑갑한 일투성이었다. 엉기고 뭉쳐 줄어든 니트처럼 운신의 폭은 좁았고, 머리는 딱딱했다. 지저분한 보풀처럼 마음의 때가 구석구석 뭉쳐 있었다. 야속한 시간은 이런 내 사정을 봐주지 않고 데드라인을 향해 무섭게 달려갔다. 남 탓하고 싶어도 탓할 사람이 없었다. 다 내가 던진 부메랑이 돌아온 거였으니까.
줄어든 니트를 늘리기 위해 먼저 뭉친 섬유를 끊어 내는 것처럼 원하지 않은 결과를 만든 버릇, 습관, 관계, 루틴은 먼저 과감히 끊는 게 필요하다. 덩어리 진 섬유를 늘려 보겠다고 용을 써봤자 섬유가 단단히 엉겨 있다면 예전 사이즈로 돌아오기란 불가능하다. 이처럼 내가 엉키고 뭉쳐 멈춰 있는데 상황이 바뀔 리는 없었다.
2024년 나의 모토는 ’ 끊기‘다. 최악부터 상상하는 습관을 끊는다. ’ 기승전우울’로 끝나는 생각의 고리를 끊는다. 나보다 타인을 앞에 두는 버릇을 끊는다. 나를 깎아 먹는 관심을 끊는다. 존중도 신뢰도 없는 해로운 관계를 끊는다. 나를 병들게 하는 강박적인 루틴도 끊는다. 자기 합리화의 달인인 나는 매몰차게 끊었던 것들을 은근슬쩍 이어갈지 모른다. 끊겠다는 다짐이 흐려질 때마다 다시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이 글을 썼다. 운, 사람, 생각, 기회 등등 뭐든 이어지기 위해 몸부림쳤던 결과가 내가 원한 모습이 아니었다면 이제 뒤도 돌아보지 말고 과감히 끊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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