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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May 21. 2024

팀장님의 수상한 초콜릿

깐깐한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로켓배송이나 샛별배송도 흔하지 않던 까마득한 시절의 일이다. 첫 녹화를 앞두고, 대본 담당이었던 난 리딩을 위해 MC 대기실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먼저 일찌감치 와서 준비 중이던 MC와 눈이 마주쳤다. MC는 팀장님, 메인 선배와 함께 얘기 중이었다. 몇 달째 머리를 쥐어짜고 몸을 갈아가며 만든 신규 프로그램의 첫 녹화 직전, 개복치처럼 긴장한 나와 달리 그들의 분위기는 느긋하고 화기애애했다. 사전 미팅을 통해 안면을 튼 사이였으니 당연한 건가? 아니 이게 다 이 험한 바닥에서 살아남은 연륜에서 우러난 여유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고인 물들의 닳고 닳은 비즈니스일까? 여러 생각들을 쇠똥구리처럼 머릿속으로 열심히 굴리며 가까이 다가갔다.     


며칠째 잠도 제대로 못 자서 얼굴은 푸석하고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지만, 비즈니스용 미소를 장착했다. 거리를 좁혀가며 내가 할 일, 즉 대본 리딩을 할 타이밍을 엿봤다. 이 프로그램의 최종 책임자인 팀장님과 메인 MC 두 사람에게 지금 중요한 건 대본 리딩이 아니었다. 그들 사이에 특별한 무언가가 오갔다.

      

"어머! 이거 어떻게 구했어요?"     


알프스산맥 마터호른 봉우리를 닮은 모양으로 유명한 스위스산 초콜릿. 일반 초콜릿도 아니고 흔치 않은 화이트초콜릿이었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쉽게 구할 수 있는 아이템은 아니었다.) 손바닥만 한 초콜릿 하나로 이 바닥에서 깐깐하기로 유명한 MC의 목소리가 사르르 녹았다.      


“아우 이거 구하느라 고생 좀 했죠.  

좋아하신다고 얘기 들어서 여기저기 뒤지고 다녔죠.

첫 녹화가 제일 힘들잖아요.

당 떨어질 때 이거 드시고 힘내서 잘 부탁드립니다. “      


”아유 그럼요. 당연하죠. 아껴 먹어야겠다.”     


병풍처럼 멀찍이 서서 이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나는 생각했다.     


’헉! 팀장님, 의외네!

프로끼리 만나서 각자 할 일만 잘하면 되는 거지

뭐 저렇게 알랑방귀를 뀌어?’     


내가 본 평소 팀장님은 젠틀하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내부에 크고 작은 일이 있더라도 티 내거나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기분이 태도가 될 때마다 팀장님의 모습을 보면서 반성했다. 그런 분이 이렇게 아부한다고? 의아했다. 녹화 시작이 코앞이니 찜찜한 마음을 일단 접어두고, 그들의 대화가 마무리될 타이밍을 겨우 비집고 들어가 대본 리딩을 했다. 큰 사고 없이 녹화를 마쳤다.  

    

녹화가 끝난 후 퇴근을 위해 대기실을 나오는 MC를 배웅하기 위해 부리나케 달려갔다. 종일 에너지를 쏟아낸 MC는 기진맥진했다. 그래도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 보란 듯이 손에 ’그 초콜릿‘을 쥐고 흔들며 모두에게 인사를 했다. 팀장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더 힘차게 초콜릿을 흔들며 말했다.     


“이거 잘 먹을게요. “     


종종 첫 녹화를 앞두고 대기실에는 많은 게 도착한다. 제일 흔한 건 꽃바구니나 케이크, 아니면 음료(혹은 커피차), 간식, 도시락 등등 당시 이미 몇 가지는 대기실에 놓여 있었다. 회사 내부의 어르신들(?)이나 협찬사에서 보낼 때도 있고, MC나 출연자의 지인이나 팬이 보낼 때도 있다. 넘치는 선물 중에서 유독 팀장님이 건넨 자그만 초콜릿이 MC의 사랑을 독차지한 이유는 뭘까? 크기도 가격도 비교가 안될 작은 선물이 왜 마지막까지 빛났을까?    


세상에는 수백, 수천 가지의 초콜릿이 있다. 집 앞 편의점만 가도 수십 종을 살 수 있다. 하지만 MC가 좋아하는 건 확실했다. 흔치 않은 하얀 만년설이 쌓인 알프스산맥을 닮은 스위스에서 온 삼각 화이트초콜릿이었다. 그 안에는 지구 최고의 쇼콜라티에가 만든 초콜릿도 없는 게 분명 존재한다. 그건 바로 ’ 마음‘! 팀장님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취향을 알아주는 마음, 신경 쓰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 응원하는 마음, 기대하는 마음 등등 작은 초콜릿 안에 무수히 다양한 마음이 똘똘 뭉쳐 있었다. 그 초콜릿을 건네받은 MC는 돈으로만 따질 수 없는 관심과 정성, 노력, 응원을 함께 받았다.    

  

조무래기의 눈에는 그저 ’뻔한 수작’ 정도로 여겼던 팀장님의 초콜릿이 일으킨 나비효과는 엄청났다. 첫 녹화는 평소 녹화의 서너 배가 넘는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간다. 예상보다 길어진 녹화에도 별다른 트러블 없이 마쳤고, 추후 녹화도 초콜릿처럼 부드럽게 넘어갔다. 어려운 손님처럼 깍듯하게 모셔야 할 거 같던 MC에서 제작진의 의도를 하나라도 더 소화하기 위해 애쓰는 한 배를 탄 '팀원’이 됐다.  

    

팀장님의 초콜릿 사건(?) 이후 사람들을 더 유심히 본다. 어떤 걸 좋아하는지, 어떤 걸 싫어하는지.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데 크기나 가격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크고 대단한 것보다 작고 사소한 관심이 상대에게 감동을 준다. 팀장님에게 초콜릿이 있다면 지금 내겐 뭐가 있을까? 주는 사람도 무리하지 않고, 받는 사람도 부담스럽지 않은 그 무언가를 부지런히 찾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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