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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un 04. 2024

무기력? 맞다이로 들어와

무기력을 무기력하게 만들기 대작전

토요일 새벽 6시 눈이 번쩍 떠졌다. 창문을 열고 날씨를 확인하니 이 온도... 이 습기... 이 날씨... 이 기분... 등산하기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습기 없는 쾌적한 날씨, 해는 뜨겁지만 그늘에 들어가면 시원함이 느껴지는 1년에 몇 없는 날이다. 간단하게 세수와 양치만 하고 선크림으로 중무장한 채 근처 사패산으로 향했다. 거창한 마음을 먹지 않아도 뒷산 오르듯 가는 곳. 날씨만 허락한다면 많이 다닐 때는 매주 1번 이상 등산을 다닌 적도 있다. 하지만 무기력증이 찾아와 한동안 산에 가지 못했다. 더 게으름 부리다가는 가고 싶어도 못 가는 날이 곧 온다. 변덕스러운 날씨, 아가미 호흡이 필요한 과도한 습기, 이름 모를 날벌레 떼의 공격까지. 등산 난이도가 높아지는 ’찐 여름‘이 코앞이다. 때를 놓치고 후회하기 싫어 마음을 동여매듯 등산화 끈을 질끈 묶었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새벽부터 산속 약수터 헬스장, 일명 ’산스장‘으로 향하는 어르신, 꿀 같은 주말 늦잠을 포기하고 땀을 흘리고 있는 프로 등산객, 정상에서 먹을 김밥과 컵라면을 짊어지고 숨을 헉헉거리며 오르는 초보까지. 이 시간에 누가 산에 갈까 싶지만, 등산 덕후는 어느 산에나 존재한다. 그 사이를 비집고 나도 정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옮겼다.     

 

오랜만의 등산이라 그런지 예상보다 빨리 숨이 가빴다. 가장 자주 오른 산이라 눈 감고도 어디쯤 경사가 가파르게 변하는지, 어디쯤 평평한 능선이 시작해 숨을 고를 타이밍인지 익숙한 곳이다. 그런데 한동안 등산을 하지 못한 탓인지 제멋대로 심장이 펌프질 한다. 주저앉아 거친 숨을 진정시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속도를 늦추고 한 걸음이라도 걸으면서 가쁜 숨이 잔잔해지길 천천히, 천천히 기다렸다.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 멈춤’이라는 편한 방법을 알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 건 다 ‘무기력’ 때문이었다. 기운이 없는 상태에서 한 번이라도 주저앉으면 다시 일어서기 힘들다. 처음 출발할 때보다 수십, 아니 수  백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한동안 등산을 못한 이유도 다 지독한 무기력 때문이다. ‘등산해야지’라는 마음을 밀린 숙제처럼 떠안고 오며 가며 산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산은 그 자리에 있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아 아니 내 마음이 나를 일으키지 못해 산에 오지 못했다.


하기 싫은 마음,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무언가를 시작하는 일도 버겁고 무서웠다. 할 수만 있다면 망망대해 무인도에 셀프 감금하고 싶었다. 그럴 수 없으니 한동안 몸과 마음이 진공 압축팩에 담긴 매트리스처럼 한껏 쭈그러들고 딱딱한 상태로 살았다.    

  

끔찍한 무기력에 시달리면서도 꾸역꾸역 책을 읽고, 또 글을 쓰는 건 이것마저 놓을 수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등산처럼 지금 내 상황에 한번 손을 놨다가 다시 시작하기 어렵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멈추기보다 천천히라도 꾸준히 오르다 보면 언젠가 정상에 오르니까. 무기력에 발목 잡힌 와중에 이것마저 멈추면 난 아무것도 안 할 게 분명했다. 완성도나 성과 보다 일단 하는 데 의의를 두고 ‘그냥’ 하는 중이다. 무력감에 흥건하게 젖어 있지만 뭐라도 해야 결과가 생기니 눈 딱 감고 하고 있다. 기분에 취해 있기보다는 늘 그랬던 것처럼 하다 보면 빛이 보이고,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내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데려다준다는 경험과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무기력을 지우는 방법은 역시 유기력뿐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다 못해 폐가 터지기 직전, 등산 경로를 알려주는 앱의 친절한 안내 음성이 귀에 박혔다. 100m 내에 정상석이 있다는 알림이다.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 계단을 오르니 정상석이 눈에 보였다.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이 북적였다. 산에 오르는 내내 한 번도 주저앉지 않고 꾸준히 오른 덕에 배지를 획득했다는 등산 앱의 축하 알림음이 이어졌다. 기록을 보니 한동안 등산을 하지 않았는데도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이 차올랐다. 역시 정직하게 쌓인 시간은 배신하지 않는다. 정상석 인증숏을 찍고 소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무릎 보호대를 단단히 착용했다. 신발 안에 들어간 돌을 털어 내고 다시 등산화 끈을 동여맸다. 땀이 식기 전 다시 하산. 오늘 공복 유산소는 충분하다. 오랜만에 등산으로 유기력을 충전했다. 덕분에 케케묵은 무기력 때문에 묵직했던 몸과 마음이 한결 가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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