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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ul 16. 2024

하와이에 작업실은 없지만 훌라는 추고 싶어

글쓰기와 훌라의 상관관계


고등학교 2학년 때, 체육 수행 평가는 조를 짜서 음악 한 곡에 맞춰 춤을 추는 거였다. 운 좋게 우리 조에는 소위 노는 친구 A가 있었다. 학기 내내 그 어떤 수업에서도 존재감을 뽐내지 않았던 A의 눈빛이 바뀌었다. 선곡, 음악 믹스, 안무 따기는 물론 춤과 낯가림하는 다른 조원들을 이끄는 참된 리더였다. 요즘처럼 K 팝 콘텐츠가 흥할 때도 아니었으니, 손수 녹화한 음악방송 비디오테이프(!)를 돌려 보면서 안무를 익혔다. 대부분 춤을 제대로 춰본 적 없어 A가 센터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 오른쪽 끝 날개, 거기가 내 자리였다. 사이드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내 임무였다. 열정적인 조장 덕분에 실력에 비해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야말로 조장이 조원들을 멱살 잡고 끌고 간 노력의 결과였다. 2주간 혼신의 힘을 다했던 수행 평가를 끝내고 깨달았다. 난 춤과 거리가 먼 사람이구나.      


슬프게도 인생은 내가 원하는 대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내가 원치 않아도 종종 나를 춤을 춰야 하는 곳에 데려다 놓았다. 대학 졸업식 후 동기들 손에 이끌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이트에 갔다. 동그랗게 원을 짜고 존재감을 뽐내는 동기들 사이에서 흔적도 없이 수증기처럼 사라지고 싶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당시 한창 유행이던 핫한 클럽에 몇 번 갔다. 춤을 추러 간 게 아니었다. 업무차 필요한 경험 투자(?) 혹은 회식 후 분위기에 휩쓸려 우르르 몰려간 거였다. 내향인에게 사람 많고 시끄러운 그곳은 사이즈 안 맞는 신발을 신은 것처럼 불편한 곳이었다.      


지난주, 관상과 사주 모두 음주는 물론 가무까지 없는 내가 내 발로 걸어 춤을 추러 갔다. 한 달에 하나씩 평생 해 본 적 없는 걸 하는 혼자만의 도전, <2024 난생처음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몇 해 전 생애 첫 책이 나오기 직전, 한창 꿈에 부풀어 있었다. 책이 세상에 나오기만 하면 베스트셀러에 올라 출판계의 신데렐라가 되는 건 아닐까?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워서 밤새 이불킥 할 망상을 품고 살던 시절, 친구가 물었다.     


책 잘 되면 뭐 하고 싶어?     

막연히 잘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실현되기 쉽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그다음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냥 불쑥 떠오르는 대로 답했다.      

 

대박 나면 하와이에 작업실을 만들고 싶어.

평소에는 한국에 살다가 원고 쓸 때는 하와이에 틀어박혀서 작업하는 거지!     


그 이후 두 권의 책을 더 냈지만 인세로 하와이는커녕 폐업했다는 부곡하와이 근처도 가보지 못했다. 매번 이번은? 하면서 기대하지만 현실은 차가웠다. 이대로라면 하와이 작업실 로망은 다음 생으로 넘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순순히 하와이를 향한 로망을 접을 내가 아니다. 로또 당첨이 되지 않는 한 하와이는 개미처럼 성실하게 돈 모아서 가는 수밖에 없다. 그걸 기다리기에 이미 내 정신과 육체는 하와이를 강렬히 원하고 있다. 하와이에 당장 갈 수 없지만 하와이 분위기를 ’ 찍먹‘할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하와이 전통춤, 훌라를 배우자.     


훌라를 배우기 위해 홍대로 향했다. 직장 생활의 스트레스를 날려주는 훌라의 매력에 빠져 훌라 강사가 됐다는 선생님의 수업이었다. 지하 연습실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춤을 배우겠다고 내 발로 지하 연습실로 향하다니! 뭔가 장르는 다르지만 첫 출근하는 아이돌 연습생이 이런 기분일까? “ 주책없이 날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연습실 문을 두드렸다. 하와이가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은 이미지의 선생님이 나를 맞아줬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곱슬머리를 늘어뜨린 선생님은 파오(pao)라는 하와이 전통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표정은 온화하고, 몸짓은 여유롭고, 말투는 부드러웠다. 오늘 수업은 하원 후 바로 왔는지 유치원 원복을 그대로 입고 온 7살 딸과 젊은 엄마, 그리고 나까지 총 세 명이다.      


훌라 하면 제일 먼저 뭐가 떠오르세요?     


선생님이 물었다. 훌라의 ’ㅎ’도 모르는 까막눈 수강생의 긴장을 풀기 위한 질문이었다. ‘여유로움‘부터 ’ 재미있을 거 같아요 ‘까지 각기 다른 답이 나왔다. 과연 그런지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자고 했다. 훌라에 대한 간단한 소개부터 길이는 짧지만 하와이에서 고기잡이하는 풍경을 담은 노래 <The Hukilau Song>의 안무를 완성하는 게 이번 수업의 목표였다. 흔히 한국에서 훌라 춤으로 불리는 훌라는 실제로 ‘춤’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훌라 춤이라고 하면 ‘역전 앞‘, ’ 초가집‘처럼 이중 표현이라고 한다.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앞으로는 입에 붙은 ’ 훌라 춤’ 대신 ’ 훌라’로만 불러야겠다 다짐하는 사이 수업이 시작됐다.      


훌라는 하늘, 바다, 바람, 물고기 등 자연의 모든 것이 손으로 표현 가능했다. 가사에 담긴 뜻을 손동작으로 옮기는 게 수어(手語)를 하는 거 같았다. 허공에 그림을 그리듯 손으로 가사를 표현하는 동작을 배운 후 발동작을 배웠다. 골반을 좌우로 흔들며 좌우로 움직이거나 앞뒤로 움직이는 스텝을 익혔다. 기분상 세 명의 수강생 중 최소 꼴찌는 아닌 거 같았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팔과 다리 그리고 골반까지 세 부분을 동시에 조합해 움직여야 하는 순간이 온 거다. 손 따로, 발 따로, 골반 따로 움직일 때는 제법 따라 할 만 했는데 세 곳을 동시에 움직이려고 하니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스텝을 신경 쓰자니 골반이 제멋대로고, 손동작을 신경 쓰자니 갓 태어난 새끼 고라니처럼 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처음이니 그럴 수 있다고, 꾸준히 배우고 곡이 익숙해지면 저절로 된다고 선생님은 하와이의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위로했다. 하지만 최연장자 수강생은 부끄러웠다. 수업 내내 슬라임처럼 흐물거리며 엄마한테 치대던 유치원생도 노래가 나오면 신기하게 동작을 해냈다. 반면 다음 생에 쓸 집중력까지 몽땅 끌어다가 수업에 귀를 기울였는데 중년의 몸뚱이는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배움이 일상인 아이의 흡수력은 무서울 정도였다. 뇌와 관절이 딱딱한 성인과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방법은 있었다. 반복 연습. 단순한 동작이기 때문에 반복해 연습하다 보니 수업 후반부 기록용 영상을 찍을 때는 제법 괜찮은 폼이 나왔다. 선생님 말씀대로 동작을 꾸준히 연습하면 오늘 배운 곡 말고도 무한대로 응용할 수 있을 거 같았다. 훌라에 새끼발가락만 살짝 담근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파가 컸다. 이날 이후 일할 때는 BGM으로 하와이 무드 곡을 튼다. 시간이 나면 그날 배웠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살짝살짝 몸을 흔들어 본다. 영상으로만 봤던 하와이의 바다, 파도, 바람, 물고기, 햇살을 수시로 상상해 본다.


이번 생에 하와이 작업실은 고사하고 하와이에 가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와이는 멀리 있지만 훌라는 가까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루지 못한 걸 두고 좌절하는 것보다, 이룬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크고 작은 기쁨을 찾아가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는 사실을 글쓰기가 알려줬다. 당분간 하와이를 향한 갈증은 훌라로 해소하며 계속 글을 쓰다 보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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