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의 심정으로 차곡차곡 수집한 일상 속 생각들
[ 꽈배기 인간 ]
어떤 분이 쓴 글에 달린 까칠한 댓글을 봤다.
당사자도 아닌 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길 댓글 하나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꽈배기처럼 배배 꼬인 댓글은
대체 어떤 사람이 다는 건가 싶어
해당 계정에 들어가 봤다.
지금까지 쓴 댓글은 대부분
불평, 불만, 비난, 비아냥, 조롱,
특정 성별, 연령, 직업에 대한 비하 등등
일관성 있게 부정적이었다.
이런 댓글을 쓰는 사람의 글은 어떨까? 궁금했다.
댓글 수보다 적지만 몇 개의 글이 남아 있었다.
외로움과 힘듦을 토로하는 글이었다.
조회수도, 좋아요도, 댓글도
거의 없는 벽에 대고 하는 혼잣말 같은 내용이었다.
단지 몇 분, 그 사람의 흔적을 훑었을 뿐인데
그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소위 '긁어서'라도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 싶은
외로운 악플러였다.
스스로 혼자가 되는 방법을 택한
그 사람을 위해 조용히 차단을 눌렀다.
[ 기적의 장소 ]
비 오는 오후, 동물 병원 앞에서 누군가 택시를 잡았다.
방금 진료를 마치고 나왔는지
축 처진 반려동물을 품에 안고 있었다.
한 손에는 우산, 다른 손으로는
반려동물을 안고 힘들어하는 모습이 신경 쓰였다.
동물 병원 건너편 카페 2층에 앉아
지켜보던 난 이 상황의 결말이 궁금했다.
빈차 램프가 켜진 택시 한 대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다가왔다.
고생이 끝나나 싶었는데 공교롭게
그 사람 바로 앞에서 빈 차가
<예약>으로 바뀌었다.
장거리 혹은 차고지 방향처럼
기사님이 더 선호하는 콜이 잡혔나 생각했다.
상황이 연속 세 번 이어졌다.
동물 병원 앞은 빈차 택시 기사님들이
콜을 받는 기적의 장소였나 보다.
동시에 그 손님에게는 불운의 장소였다.
당연히 내 차례가 올 거라고 믿던 시절이 있었다.
내게 가까이 오다 어느 순간
불운의 램프가 번쩍 켜졌다.
기회가 날 매몰차게 스쳐 지나갔다.
날 태우지 않고.
우연이 아니었다.
[ 인사를 안 하면 생기는 일 ]
아가미 호흡이 필요한 꿉꿉한 날씨라
얼음이 찰랑이는 시원한 커피가 급당겼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하고 기다렸다.
곧 내 커피가 완성됐다고 호출하는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달려가 커피를 냉큼 받은 후 말했다.
”감사합니다.“
커피를 내주던 직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왜 인사를 안 하지? 손님이 감사하다고 하면
최소 눈인사나 목례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라며 의아함이 차오르다 못해
슬슬 화가 났을 상황이다.
그런데 이젠 그냥 이렇게 생각해 버린다.
“아이고 직원이 피곤한가 보네.
손님 응대할 기력이 없네.
나도 기분이랑 컨디션 괜찮을 때나
이 카페 와야겠다.
이런 게 신경 쓰이면 여기서 즐겁게 커피 못 마시지.
아아의 축복을 누리는 작고 귀여운 시간과
소중한 내 기분을 망칠 순 없으니까”
[ 편견이 깨진 이유 ]
점심을 먹으러 간 뷔페.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청소년 여섯이 앉은 테이블 옆자리가 배정됐다.
그 사실을 감지했을 때 살짝 두려웠다.
조용히 식사하기는 어렵겠구나 싶어서.
음식을 가지러 다녀오니
청소년들의 빈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나와 시간차를 두고 새 음식을 가지러 갔는지
의자는 비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빈 접시가 하나로 차곡차곡 포개 있고
사용한 냅킨과 물티슈가 한쪽에 모여 있었다.
식사 예절 교육을 잘 받은 친구들이었다.
배려와 친절이 몸에 밴 청소년들이었다.
정돈보다는 자유를 갈구하는 저 또래 친구들이라면
으레 자리는 엉망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 뷔페 안 어느 테이블 보다 단정했다.
미디어나 SNS를 통해 접한
소위 ‘요즘 애들’을 향한
부정적 프레임이 와장창 깨졌다.
청소년들은 조용조용 식사를 했고
얼마 후 학원 수업 늦기 전에 가자며 일어섰다.
걱정했던 식사 자리는 평화로웠고
나의 해묵은 편견은 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