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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변잡기

녹차 명인에게 배운 글쓰기의 기술

경험과 상처가 당신의 글을 단단하게 만들리라

by 호사


언젠가 운 좋게 지리산 자락에 사는 녹차 명인의 작업 과정을 엿볼 기회가 있었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차밭에서 종일 참새 혀처럼 작고 여린 찻잎을 함께 땄다. 머리카락은 물론 옷의 어깨까지 촉촉이 젖을 즈음, 자루 하나 가득 찻잎이 쌓였다. 묵직해진 자루를 지게에 지고 작업장으로 옮긴 뒤, 그 찻잎을 손질하고, 덖고, 비비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했다.


생잎일 때는 몇 자루나 되었던 찻잎이 모든 과정을 거치고 나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초록빛 찻잎은 수분이 날아가고 세포가 파괴되며 엽록소가 빠져나가면서 우리가 익히 아는 까무잡잡하고 바삭한 녹차로 거듭났다.


차를 마시기만 했을 때는 찻잎을 따서 말리면 그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 과정은 훨씬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갔다. 명인 옆에서 거들었을 뿐인데도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많이 땄는데, 완성된 차는 고작 이 정도뿐이라니 싶었다.


그런데 모든 과정을 마치고 명인이 내어주신 햇차를 한 모금 마시는 순간, 그 허무함은 씻은 듯 사라졌다. 도시보다 기온이 5도쯤 낮은 지리산 산비탈에서 봄비를 맞으며 오들오들 떨던 하루가 차 한 잔 속에 녹아내렸다. 그간의 고생이 잊힐 만큼 향기롭고 부드러운 맛이었다. 여린 찻잎이 사람 손에 잘리고, 뜨거운 팬에 볶이고, 손으로 짓이겨지는 일은 단지 고통이 아니었다. 고유한 향과 맛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그 모든 과정 없이 만들어진 차는 그저 마른풀을 우린 물에 지나지 않는다.


글을 쓰는 일도 좋은 차를 만드는 일과 닮아 있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 먼저 재료부터 모아야 한다. 독서, 체험, 만남, 전시, 여행, 공부, 운동... 다양한 활동을 하며 글감 자루를 가득 채워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얻은 생각과 아이디어, 감정과 고민을 머릿속 뜨거운 팬 위에 올려놓고, 덖고, 비비고, 말리듯 글로 써 내려가야 한다.


백 가지 경험을 해도 결국 몇 페이지의 글로밖에 남지 않을 수 있다. 수천 시간의 고민과 노력이 종이 몇 장에 그칠 수도 있다. 그러나 제대로 덖어낸 글은, 생각지도 못한 먼 곳까지 퍼져나간다. 작가가 가보지 못한 땅에 사는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조용히, 향기롭게 피어날 수도 있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 다양한 경험을 귀찮아하지 말고 온몸으로 부딪히자. 그저 겪는 데서 멈추지 말고, 꼭 글로 마무리하자. 아무리 뛰어난 기억력도 시간이 지나면 감정은 휘발되고 만다. 그러니 부지런히 기록하자.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의 마음에 닿기 위해. 그래서 나는 오늘도 경험과 상처들을 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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