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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변잡기

탓할 사람이 필요했던 거겠지

개복치 인간의 생존법

by 호사


“작가님,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회식 자리, 얼큰하게 취한 팀원이 굳이 자리를 옮겨 내 앞에 앉더니 소주 한 잔을 무섭게 들이켠 후 말했다.


“작가님이 저 일 못 해서 이 프로젝트 망하겠다고 말하셨다면서요?”


맨 정신에는 못하고 술기운을 빌려야만 할 수 있었던 말일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개복치 인간의 심장에 핵폭탄을 떨어뜨렸다.


손끝이 야무지진 않아도 설렁설렁 일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빠릿빠릿하지 못해도 요령을 피우는 팀원은 아니었다. 휴대전화도 안 터지는 오지 촬영 현장에 맨몸으로 덜렁 왔길래 “아무리 정신없이 나왔어도 시간은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위험하니까 이거 챙겨요”라고 말하며 내 손목시계를 풀어 채워줬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마음 써줬던 팀원에게 그런 얘기를 들으니, 머리가 띵했다.


“제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그냥… 뭐... 저기... 어디서 주워 들었어요.”


어디서 어떤 말을 들었는지 ‘없는 말 메신저’의 정체를 당당히 밝히지는 못했다. 우물쭈물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짠했다. 억울했지만 따지지 않았다. 대신 계산했다. 왜 지금, 왜 나였는지를. 애초에 나는 그런 말을 할 깜냥도 없는 유리멘털 인간이라 오히려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근데요. 이 프로젝트가 한 사람이 못해서 망할 사이즈인가요?

잘되면 팀이 잘한 거고, 망하면 책임은 저를 포함한 윗선에 가는 거잖아요. 생각해 보세요.

이 프로젝트 참여 인원이 100명이 넘는데 본인 하나로 프로그램 생사가 갈린다고 믿는 건…

자의식 과잉이 아닐까요?”


그는 고개를 숙였고, 나는 술잔을 채웠다. 오해가 풀렸는지 모르겠지만 잔상은 오래갔다. 그날 이후, 내가 하지 않은 말로도 누군가를 위협할 수 있다는 걸 자주 떠올린다.


인생 최대의 목표는 <민폐 끼치지 않고 살기>다. 그래서 조심조심 산다. 그렇게 단속하며 살아도 내가 의도하건 의도치 않건 민폐를 끼치는 상황이 온다. 내가 민폐를 끼쳤다는 사실을 직면할 때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새카만 구덩이에 빨려 드는 기분이다. 내 존재 자체가 민폐 덩어리처럼 느껴져서.


나를 갉아먹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날도 많았다. 침대 위에서 이불킥을 하기도 했고, 잠 못 들어 밤을 하얗게 지새운 날도 있었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해 봤자 결론은 하나였다. 그 사람에겐 내가 그런 사람이어야 마음이 편했겠구나. 누군가는 누군가를 탓해야 살 수 있으니까. 내면이 단단하지 못한 사람은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다. 그러니까 결국, 나는 그날 누군가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소모품 같은 거였던 거다. 꼭 나일 필요도 없었고, 운이 나쁘게 마침 거기 있었을 뿐. 입 다물고 고개 끄덕일 타입이면, 뭐, 완벽하지. 처음엔 이 상황이 억울해서 밤을 설쳤지만, 오래 생각할수록 점점 웃겼다. 나는 무슨 죄인가 싶다가도,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누군가가 지어낸 거라면 그 말 자체가 애초에 공기 같은 거 아닐까 싶어서.


그러니까 결국 나는 그날 누군가의 감정 쓰레기를 무단투기 당한 거였다. 마침 그 자리에 있었고, 반박할 멘털도 없어 보였고, 술이 깬 다음 날까지 따지러 올 스타일도 아니었으니 딱 탓하기 좋은 인간. 그걸 알았더니 조금 편해졌다. 억울한 감정은 어차피 입 밖에 내는 순간 구차해지고 항변은 대부분 지는 쪽이 더 많이 하게 돼 있으니까. 그래서 이젠 그냥 이렇게 생각한다.


“누군가를 탓해야 사는 사람도 있고, 탓당해도 잠 잘 자는 사람이 있다.”


나는 후자 쪽이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되면 그냥 빨리 자는 쪽이라도 하자. 수면 영양제의 도움이라도 받으며 잠을 깊이 잔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고 일어나면, 또 어떻게든 산다. 살아남긴 해야 하니까. 개복치 인간은 그렇게 조용히, 오래, 얇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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