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업데이트 중인데 나는 아직 로딩 중
건널목 앞에서 초록불이 켜지길 기다리며 멍하니 서 있을 때였다. 누군가 내 앞에 스르륵 다가왔다.
“저기요, 주민센터 가려면 어디로 가요?”
스마트폰 지도 앱을 사용하지 않는 걸까? 자전거를 탄 허름한 차림의 노년 남성이 길을 물었다. 몇 해 전, 집 근처에 있던 주민센터는 도보 20분 거리의 신축 아파트 단지 옆으로 이전했다.
“저 초록색 아파트 건물 보이세요? 저쪽으로 쭉 가시면 돼요.”
내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삐걱거리는 낡은 자전거의 페달을 천천히 밟았다.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한 뒤로, 누군가에게 길을 물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지도 앱이 방향도 거리도, 심지어 교통 상황까지 다 알려준다.
‘나도 나이 들면 저렇게 물어보게 될까?’
남자의 등이 점점 멀어지는 걸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날의 목적지는 전자제품 수리 센터였다. 노트북에 문제가 있어 들고 나왔다. 20분쯤 걸어서 도착하니, 잠시 화장실에 갔는지 안내 데스크에 직원은 없고 키오스크 세 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그중 하나를 골라 화면을 터치했다.
고장 수리, 휴대폰 수리비 조회, 보호필름 부착, 간단 문의.
나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고장 수리’를 눌렀다. 접수증 출력을 기다리던 그때 백발의 할머니가 옆자리 키오스크 앞에 섰다.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손가락이 허공에서 방황했다.
길을 잃은 손가락, 어색한 웃음, “이거 어떻게 하는 거더라?”라는 표정.
익숙한 장면이다. 엄마와 함께 식당에 갈 때마다 반복되는 그 장면. 매번 테이블 오더 사용법을 가르쳐 드려도 시도할 때마다 매번 새로워하시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손가락이 닮았다. 할머니께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휴대폰 고치려고요…”
나는 할머니 대신 ‘고장 수리’ 버튼을 눌러드리고, 개인정보 동의와 연락처 입력을 도왔다. 몇 번의 터치가 끝나자, 할머니는 고맙다고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그 짧은 순간, 잠시 시간 여행을 한 기분이었다. 아마도 먼 미래의 나를 도와주는 누군가의 손길을 미리 경험한 느낌이었다. 대기석에 앉았지만, 시선은 계속 키오스크 쪽으로 향했다. 혹시 또 다른 ‘미래의 나’가 나타나지는 않을까 싶어서.
코로나 이후 세상은 급속도로 변했다. 식당, 병원, 카페, 은행, 주민센터까지 키오스크와 테이블 오더가 일상이다. 낯가림이 심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한편으론 편리해졌지만, 또 한편으론 더 어색해졌다. 새로운 기술이 100만큼 발전하면, 내가 쓰는 건 고작 30 정도다. 남들은 인공지능 비서를 부르는데 나는 아직 비밀번호를 매번 틀린다. 기술의 속도를 쫓는 일은 마라톤처럼 느껴진다. 숨이 차서 헐떡이지만 멈출 수 없다. 그러다 문득, 뒤처지지 않으려 애쓰는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언젠가, 가족 식사를 마치고 중학생 조카의 손에 이끌려 네 컷 사진을 찍으러 간 적이 있다. 조카는 낡은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순식간에 버튼을 눌렀다.
“인원이 많으니까 가로형, 사진 개수는 8분할, 포즈는 이렇게, 필터는 이거요!”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빨랐다. 낡은이들은 조카가 이끄는 대로 표정을 지었고, 사진 속엔 ‘신문물의 어색함을 견디는 어른들과 능숙한 아이’가 함께 찍혀 있었다. 갓 나온 따끈따끈한 사진을 보며 웃다가 문득 생각했다. 기술은 세대를 나누지만, 배움은 연결한다는 걸. 예전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길을 가르쳐줬지만, 이제는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디지털의 길’을 가르쳐준다.
나는 오늘 길을 묻는 노인에게 가는 길을 알려줬고, 조카는 나에게 ‘네 컷 사진’이라는 새로운 세상의 길을 알려줬다. 결국 배우는 일에 나이가 없고, 가르침의 순서도 늘 바뀌기 마련이다. 세상은 계속 변하겠지만 서로의 속도를 맞춰 걸어주는 마음이 있다면 마냥 외롭지도, 초라하지도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