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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변잡기

보풀제거기가 뭐라고

시도 후에 오는 것들

by 호사

날이 추워진다는 일기 예보에 미뤄뒀던 옷장 정리를 시작했다. 개학을 코앞에 두고 밀린 숙제를 초등학생처럼 꾸역꾸역. 여름옷을 꺼내 서랍 공간을 만들고, 겨울옷을 채워 넣었다. 5단 서랍장의 3층은 니트를 넣는다. 대충 다 넣었나 싶어 뒤를 돌아보니 서랍은 만석인데 아직 남아 있는 니트가 여럿이었다. 남은 녀석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묘하게 손이 가지 않는 녀석들. 그 이유는 보풀이었다.


백화점 출신도 있었고, 길바닥 출신도 있었다. 가격이나 소재에 상관없이 화학 섬유가 들어간 옷에 보풀이 일어나는 건 필연이었다. 소매며 배 부분(대체 왜!!!!)에 보글보글 보풀이 일어난 옷을 입고 거울을 보면 #거지왕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보풀의 크기는 작아도 궁상 수치는 높였다. ‘나중에 시간 날 때 이 보풀 떼야지.’ 하고 옷을 벗어 옷장 깊숙이 넣어 놓기를 몇 번. 어김없이 제대로 한 번 입어 보지도 못하고 겨울이 흐른다. 그렇게 여름옷과 바통터치를 한지도 몇 번. 이번 겨울에도 구원하지 않으면 꿈에 나타나 자기 몸의 실을 풀어내 목을 칭칭 감을 것 같은 비주류 니트들이 내 양심을 쿡 찔렀다.


보풀 응급 수술이 필요한 녀석들을 늘어놓고 결심했다. ‘이 녀석들, 오늘 살릴 수 없으면 이번에 버린다!‘ 욕실에서 아빠의 일회용 면도기를 가져와 보풀을 살살 긁기 시작했다. 집게손가락 길이보다 짧은 날을 가진 면도기로 보풀이 덕지덕지 붙은 니트들을 수술하기 벅찼다. 수없이 긁고 긁어도 마음처럼 개운하게 바뀌진 않았다. 3번째 쨍한 아쿠아 블루 색 니트 소매 부분을 긁다가 면도기를 내던졌다. 그리고 스마트 폰을 열어 전동 보풀 제거기 구매 버튼을 눌렀다. 10년 넘게 마음속 장바구니에만 넣어 놨던 보풀 제거기를 드디어 주문했다.


다음 날 오후 택배가 도착했다는 알람이 뜨자마자 총알처럼 튀어 나가 박스부터 열었다. 잠시 충전을 마치고 테스트의 시간. 그르릉 그르릉 고양이의 골골송 같은 모터 소리를 내는 보풀 제거기는 니트 위로 내달렸다. 마치 아우토반을 달리는 스포츠카처럼. 돌리고 돌리고. 내 옷을 다 돌리고도 모자라 집안의 모든 보풀이 있는 옷들을 꺼내 와 집도했다. 모터 소리와 깎인 보풀이 모이는 통을 비울 때마다 새어 나온 먼지로 집안은 가득 찼다. 보풀에 미친 사람처럼 눈을 반짝이며 보풀 제거를 집도하는 내 모습을 본 엄마는 말했다.


“이러다 이 세상 옷 다 보풀 제거하겠네”


“진짜 그러고 싶은 심정이야.

이렇게 쉽고 간단한 걸 매번 미루고 마음 불편하게 살았을까?”


내 마음에는 거대한 양팔 저울이 있다. 왼쪽에는 해야 할 것, 오른쪽에는 내가 투자해야 할 노력을 두고 저울질한다. 노력 대비 결과가 미미할 거 같으면 대체로 시도조차 안 했다. 포도를 앞에 둔 여우처럼 ‘저건 아마 시고 맛이 없을 거야’라고 단정하고 뒤돌아섰다. 쉽게 말해 계산기를 두드려 보고 아무리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도 내 판단에 득이 되지 않으면 누구보다 빠르게 마음을 접었다.


보풀 제거기도 마찬가지였다. 주위에서 소소하게 삶의 질이 높아지는 인생 아이템이라면서 추천했다. 하지만 1년에 몇 번이나 쓴다고, 보풀 생긴 옷 말고 다른 옷 입으면 되는데?, 정 필요하면 면도기로 살살 긁지 뭐. 이런 식으로 머릿속에서 ‘사지 않아야 할 이유를 100개’쯤 만들었다. 그래서 삶이 단출하다는 점이 좋기도 하지만 솔직히 불편하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내가 놓쳐 버린 기회와 하지 못한 경험들이 내 인생에 넘쳐난다는 거였다. 분명 내 선택이지만 많은 가지들을 혼자서 쳐내면서 성장할 기회들을 스스로 걷어찼다. 귀찮아서, 실패할 거 같아서, 돈 많이 들 거 같아서, 상처받을 거 같아서, 남들이 이상하게 볼까 봐 등등하지 않을 이유를 대는 건 시도하고 노력하는 것보다 천 배는 쉬웠다.


시도 후에 오는 것들이 있다. 대부분은 실패고, 성공은 드물었다. 근데 그건 성공과 실패 단 두 가지로만 나눴을 때의 기준이다. 성공/실패라는 선택지가 아닌 <○○한 경험>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삶이 좀 더 다채로워진다. 탈락했지만 재미있는 경험, 포기했지만 의미 있는 경험, 통과했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경험, 합격했지만 숙제를 안겨준 경험, 부상을 입었지만 교훈이 컸던 경험 등등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는 내 마음에 달렸다. 무슨 시도를 하든 남는 게 있고, 그 과정은 나를 한층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오늘 나는 오래 미루던 옷 몇 개를 살려냈다. 아니, 사실은 오래 미루던 나 자신을 조금 덜 미루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경험치 +1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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