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오래 쓰는 방법
주말 아침 목표는 21km 달리기였다. 누가 시킨 것도, 대회에 나갈 것도 아니지만 그냥 나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평소에는 컨디션에 따라 7~10km 정도 달렸고, 최대 15km까지 달려봤다. 더 날이 추워지기 전에 하프를 뛰어 보고 싶었다. 준비라고 해봐야 평소 입던 운동복을 입고서 하던 순서대로 몸을 풀었다. 단, 평소에 비해 80%로 속도를 낮춰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반환점으로 찍어둔 10.5km 지점에 도착했을 때 의외로 괜찮았다. 평소 10km를 뛰어왔으니 앞으로 달릴 10.5km가 본게임이었다. 기쁨과 두려움이 뒤섞인 얼떨떨한 기분으로 휴대전화를 확인하다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배터리 잔량 47%. 휴대전화가 오래된 탓에 배터리가 빨리 닳기는 하는데 러닝 기록 앱과 음악을 동시에 구동하니 빛의 속도로 줄었다. (내 핸드폰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과폰은 배터리 잔량이 20% 아래로 떨어지면 쥐도 새도 모르게 꺼지는 건 시간문제다.
겨우 절반을 달렸고, 온 만큼 다시 달려야 한다. 그런데 중간에 휴대전화가 꺼지기라도 하면 어쩌지? 덜컥 겁이 났다. 예전에 뛰다가 전화를 받으면서 앱을 ‘일시 정지’ 해둔 적 있었다. 한참 달린 뒤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일시 정지를 해제하고 달렸지만 이상하리 만치 다리가 무거웠다. 기록이 남지 않는 달리기에 허무함이 생각보다 컸다. 아... 나는 아직 기록에 흔들리는 초보 러너구나. 그때야 알았다.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초절전모드. 구동되던 앱을 모두 정리하고 음악도 껐다. 오직 러닝 기록 앱만 켜둔 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음악을 들을 수 없으니 이어폰도 빼버렸다. 지면을 내딛는 착착착 리드미컬한 내 발소리, 영역 다툼하는 까치 소리, 스피커로 트로트를 틀어놓고 지나가는 자전거가 흩뿌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머지 10.5km를 달렸다. 처음이었다. 이어폰 없이 달리는 건.
평소라면 러닝 기록 앱의 알람 소리로 목표한 거리를 완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알람이 없으니 출발 지점에 가까이 도착해 감으로 이쯤이면 됐다 싶을 때 핸드폰을 확인했다. 19.47km. 얼마 남지 않았다. 걱정과 달리 그 사이 핸드폰은 꺼지지 않았고, 남은 배터리는 35% 정도. 러닝 기록 앱은 착실하게 구동되고 있었다. 묵직한 다리에 다시 힘을 빡 주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21.00km라는 숫자가 찍혔다. 그 아래 최장 거리 러닝, 최장 시간 러닝, 하프 마라톤 최고 기록을 비롯해 총 5개의 기록 배지가 반짝였다. 이제 남은 개인 기록 배지는 단 하나, 마라톤 최고 기록뿐이었다.
요즘 나는 초절전모드로 살고 있다. 일도 크게 벌이지 않고, 사람도 자주 만나지 않고, 지출도 최소화한다. 대신 혼자 사부작사부작 안 해보던 걸 하고, 안 가본 길을 가고, 관심 없던 분야를 하나씩 문을 두드려 보고 있다. 처음에는 정적이 너무 낯설었다. 외롭고 심심해서 초절전모드를 셀프 해제 버튼을 누를지 걱정도 했다. 그러면 다시 이전에 살던 대로 남들의 속도와 남들의 시선, 남들의 눈높이에 맞추느라 또 아등바등하며 살 거 같았다.
초절전모드가 만든 세상과의 단절은 의외로 새로운 것에 눈을 뜨게 했다. 사람들과 복작이는 수다 자리를 대신해 각종 새와 길고양이, 너구리가 오가며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됐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면서 기분 좋은 긴장감과 소소한 성취감들을 매일 느끼며 살고 있다. 남들의 속도가 아니라 내 리듬을 따라 달리는 날이 많아졌다.
초절전모드는 방전되지 않고 나를 오래 쓰기 위한 선택이었다. 불필요하게 손실되는 에너지를 줄이고, 작더라도 꾸준히 에너지를 채워야 했다. 대단한 목표, 큰 성과, 높은 무언가를 꿈꾸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꺼지면 아무 소용없다는 걸 몸으로 배웠다. 이 초절전모드가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모르겠다. 언젠가 초절전모드를 해제하는 날이 오더라도 정말 중요한 하나만 남기고 모두 스톱하는 이 방식, 이 감각은 오래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