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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변잡기

나 홀로 등산보다 위험한 건 ’나 홀로 대화법‘

말을 할 때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한 이유

by 호사


“근데 산에 혼자 다니면… 위험하지 않아요?”


등산을 해보고 싶다는 후배가 조심스레 물었다. 나도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다. 뉴스에서 접하는 ‘나 홀로 등산족’의 사건, 사고들이 떠오르면, 혼자 산에 오른다는 게 괜히 겁나 보인다. 시간만 맞아 지인들과 함께 가면 좋겠지만,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드물었다. 있다 해도 각자의 일정을 맞추는 건 더 어렵다. 그렇게 눈치 보고 시간을 맞추다가, 짧디 짧은 ‘등산의 황금 계절’을 몇 번이나 흘려보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대신, 나만의 안전 수칙을 만들었다.


1. 동선과 대략의 시간을 주변 사람에게 공유한다.

2. 평일보다는 사람 많은 주말을 선택한다.

3. 평일에 간다면 유명하고 사람이 많은 산으로 간다.

4. 오전에 올라 점심 무렵에는 내려온다.

5. 기본 안전 장비는 꼭 챙긴다.

6. 몸 상태와 날씨가 살짝이라도 이상하면 무리하지 않는다.


이 정도만 지켜도 꽤 안정적으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지난 주말에도 올해 목표한 등산 횟수를 채우려고 아침 6시에 집을 나섰다. 9시 반, 보통 때라면 이불속에서 뭉그적거릴 시간인데, 나는 이미 정상을 찍고 하산 중이었다. 올라오는 사람들보다 내려오는 사람이 훨씬 적은 시간. 헉헉대며 올라오는 이들을 보며 조용히 응원했다.


그러다 난간을 붙잡고 오르내려야 하는 좁은 암릉 구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길이 좁아 둘이 지나기 힘들어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을 먼저 보내기 위해 기다렸다. 차가운 공기 탓에 등산 내내 콧물이 흘렀다. 멈춘 김에 손수건을 꺼내 조용히 닦았다. 건너에서 오는 사람에게 보내는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라는 말 없는 신호였다.


이런 배려는 산에서 자연스럽게 배웠다. 올라가는 사람에게 하산자가 양보해 주는 일종의 작은 예의랄까?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산에서는 이런 미덕이 자연스럽게 흐른다. 손수건을 접어 넣고 고개를 들었을 때, 반대편에서 오던 사람이 눈을 맞추며 또렷하게 말했다.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멀리서 봤을 때는 평범한 등산객 같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키가 큰 외국인이었다. 한국어가 꽤 능숙했고, 문장도 정확했다.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유까지 포함된, 단정한 문장. 외국인이어서 스몰토크가 자연스러웠던 걸까? 짧은 순간, 여러 생각이 스쳤다. 나는 자동판매기처럼 말했다.


“선생님도 조심히 올라가세요…”


외국인에게 선생님이라니... 말하고 나서도 괜히 민망해 혼자 웃음이 났다. 그래도 그는 환하게 인사하며 올라갔다. 짧은 순간이었는데도 마음에 핫팩을 얹은 것처럼 따뜻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떻게 말하고 살았지?‘


효율을 중시하는 일상 속에서, 나의 말은 늘 빠르고 짧았다. 말이 조금 길어지면 장황하다고 느끼고, 감정을 담기보단 ‘핵심만’ 빠르게 전달하려 했다. 하지만 산에서 만난 살짝 길었지만 마음을 담은 그 한 문장은 다르게 남았다. 고맙다는 말도 좋지만, ‘왜 고마운지’까지 이유가 담긴 말은 마음에 오래 머문다. 양보의 순간은 금방 지나갔지만, 그의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내 하루를 길게 비췄다. 그날 이후 말을 할 때 한 번 더 생각하게 됐다. 조금 느려도, 상대 마음에 온기가 남는 말을 해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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