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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변잡기

인사 멸종위기의 시대

사소하지만 오래 남는 태도에 관하여

by 호사


약속이 잡히면 늘 일정에 ‘그보다 조금 앞선 시간’을 끼워 넣는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생긴 습관이다. 내향인이라 그런지, 아니면 평생 예측 불가한 교통 패턴을 통과하며 살아온 후유증이 몸에 밴 경기도민이라 그런지 모르겠다. 어찌 됐든 약속 장소 가까이에 도착해 혼자 몸과 마음을 예열하는 그 시간이 꼭 필요하다.


보통은 약속 한 시간 전쯤 도착해 가장 가까운 카페에 들어간다. 늘 같은 루틴이다. 주문하고, 자리를 잡고, 가방을 열어 책 한 권이나 스마트폰을 꺼낸다. 그 시간만큼은 아무에게도 쫓기지 않는다. 편안하게 내 속도로 호흡하고, 내 속도로 마음을 정리한다. 곧 도착할 사람과의 대화도 미리 여유를 갖고 시작하는 느낌이다. 누군가에게 기다림이 지루함이라면, 나에게 기다림은 여유를 최대한 누릴 수 있는 작은 은신처다. 늦을 가능성도 없고, 헐레벌떡 뛰어갈 일도 없다는 걸 아는 그 안정감이 좋다.


그날도 똑같았다. 강남에서 일이 있었고, 그 근처 스타벅스를 찾았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이렇게 작은 스타벅스도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작은 곳이었다. 테이크아웃 전문점인가 싶었는데 자리도 몇 개 있었다. 고작 일곱 개 정도. 그나마 남아 있는 곳은 픽업대 바로 앞 하나뿐이었다. 굳이 걸음을 더 옮기기 귀찮아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앉는 순간, 내향인의 관찰 모드가 자동으로 켜졌다. 그런데 묘하게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됐다. 바로 픽업대. 직원이 밝은 목소리로 “음료 나왔습니다~”라고 외치고 건넸다. 분명 미소도, 억지 같지 않은 톤도 다 갖춘 완성형 인사였다. 그런데 손님 10명 중 절반 이상이 아무 말도 없이 음료만 들고 갔다. 3명 정도가 가볍게 목례했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사람은 고작 2명 정도. 강남이라 이렇게 바쁜 걸까? 아니면 지금 시대가 인사를 천천히 잃어가는 중인 걸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겪어왔던 ‘인사 없는’ 순간들이 떠올랐다. 손님이 들어와도 고개 한 번 들지 않는 직원이 있던 음식점. “어서 오세요” 인사 대신 물과 메뉴판만 툭 던지는 직원. 전화받자마자 인사도 없이 “네, 말씀하세요”로 시작하는 상담. 물건을 사러 갔는데 말 인사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고 핸드폰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직원. 학교나 직장에서 인사를 해도 못 들은 척 지나가던 상사와 선후배들까지.

이런 경험은 직업도, 장소도 가리지 않고 꾸준히 쌓여왔다. 큰 사건은 아니다. 하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작은 무시가 제일 오래 남는다. 아무리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해도 이런 장면을 겪고 나면 괜히 마음 한구석이 시들해진다. 인사에 인색한 사람에게 돈도, 마음도, 시간도 쓰고 싶지 않다. 인사는 사소하지만, 인사로 시작된 감정의 파문은 의외로 크다.


그래서 픽업대 앞에 선 그 직원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손님들이 인사를 받아주든 말든, 그 직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표정과 같은 톤을 유지했다. 한 사람이라도 눈을 맞춰주면 조금 더 밝아지는 미소도 보였다. ‘아, 아직 이런 사람이 남아 있구나.’ 그런 생각이 스쳤다.


요즘은 참 이상한 시대다. 인사를 잘한다는 건 기본적인 예절의 문제라기보다, 사람된 맛이 묻어나는 마지막 지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일상에서 점점 귀해지는 탓이다. 익숙한 도시에 살면서도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간단한 말이 사라지고 대신 빠른 일 처리와 무표정한 효율이 자리 잡아간다.


물론 바쁜 도시에서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걸 강요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한 번의 고개 끄덕임, 짧은 한마디, 가벼운 눈 맞춤만으로도 분위기는 확실히 달라진다. 그리고 그 변화는 ‘주는 사람’보다 ‘받는 사람’에게 더 오래 남는다.

그 직원의 인사는 그날 나에게 작은 울림으로 남았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예의와 자신의 태도를 지키는 사람들. 그들은 요즘 시대에 거의 ‘멸종위기종’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더 응원하고 싶었다. 카페를 나서기 위해 마셨던 컵을 반납할 때 평소보다 조금 더 크게 말했다.


“잘 마셨어요. 감사합니다!”


그 직원의 표정은 잠시 환해졌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 사람은 하루 종일 같은 일을 반복할 테지만, 그 한순간만큼은 분명 서로에게 작은 선물이 되었을 거다.


인사는 그 어떤 기술보다 배우기 쉽고, 그 어떤 장비보다 저렴하다. 하지만 그 효과는 오래가고 강력하다.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고, 기분을 정돈시키고, 마음의 경계선을 조금씩 허문다. ‘사람 좋아 보인다’는 말의 뿌리는 결국 인사에서 시작된다. 사소해 보이는 이 차이가 쌓이고 쌓여 결국 큰 차이를 만든다. 경쟁은 점점 치열해지고, 관계는 갈수록 건조해지는 시대.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인사를 ‘습관’이 아니라 ‘무기’로 장착해 둘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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