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넓고, 배워야 할 미덕은 베이글집 쇼케이스 안에도 있다
서초구 양재동, 우면산이 느긋하게 내려다보는 주택가 골목. 이곳은 한강을 넘고서도 한참 위쪽에 사는 경기 북부 주민에게 평소라면 동선에 걸릴 일도 없는 곳이다. 이 호젓한 동네에 발을 들이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리고 그 우연은 곧 '잊지 않고 들러야 할 명분'이 되었다.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라도 켠 듯 도심의 소음이 느껴지지 않는 한적한 주택가 모퉁이. 그곳에 앉아 꽃이 피면 피는 대로, 비가 오면 적시는 대로, 눈이 내리면 쌓이는 대로 변하는 계절을 감상하며 베이글을 씹는다. 화가가 캔버스 위에 유화 나이프로 물감을 펼치듯 베이글 위에 스프레드 나이프로 형형색색의 크림치즈를 펼쳐 먹다 보면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신기하게도 머릿속을 지끈거리게 하던 현실의 잡음은 크림치즈의 질감처럼 부드럽게 녹아내린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쫄깃한 베이글의 그 '겉바속쫄'의 매력도 훌륭하지만, 이곳의 진정한 주인공은 단연 크림치즈다. 쇼케이스를 가득 채운 크림치즈 군단은 줏대 없는 소비자에게 매번 시련을 준다.
기본인 플레인을 필두로 레몬딜, 트러플, 바질, 썬드라이 토마토, 무화과, 베이컨 쪽파, 마롱밤, 메이플 월넛까지. 매일 매장에서 직접 만든다는 화려한 크림치즈 라인업 앞에 서면 마음이 흔들린다. 짭짤하고 고소한 '베이컨 쪽파'를 고르려니 달콤하고 포근한 '마롱밤'이 눈에 밟히고, 상큼한 '망고 크랜베리'를 고르려니 고소함의 끝판왕인 '메이플 월넛'이 발목을 잡는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돌아섰다가도, 주문한 음식을 받으러 가는 길에 쇼케이스 안의 탈락자(?)들과 눈이 마주치면 비장한 기약 없는 약속을 남기게 된다.
"미안! 다음번엔 꼭 너희를 데려갈게. “
이날의 선택은 '베이컨 쪽파'와 '메이플 월넛'. 그리고 조연이라기엔 너무나 묵직한 '연어 베이글 샌드위치'였다. 우선 베이컨 쪽파부터 한 입. 베이컨의 짭조름함과 쪽파의 알싸한 향이 크림치즈라는 완충지대에서 평화를 이룬다. 메이플 월넛은 또 어떤가. 달콤한 메이플 시럽 향이 훅 치고 들어오면 뒤이어 콰작하고 씹히는 호두가 입안에서 탭댄스를 춘다. 피날레는 연어 샌드위치. 평소 연어를 그리 즐기지 않는 나조차도 두툼한 연어가 산뜻한 플레인 크림치즈와 만나 비린 맛 하나 없이 고소하게 어우러지는 광경 앞에서는 무장 해제될 수밖에 없었다.
여유롭게 즐기려던 브런치는 식탐 앞에 무너졌고, 베이글은 빛의 속도로 사라졌다. 빈 접시를 보며 남은 차를 홀짝이다 문득 경이로운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크림치즈란 뭘까?
어째서 얘는 단맛, 짠맛, 신맛, 알싸한 맛은 물론이고
생선의 비린 맛까지 이토록 완벽하게 품어버리는 걸까?'
크림치즈의 포용력을 실감한 게 이번만은 아니다. 와인 곁의 카나페나 채소 스틱의 딥소스, 혹은 꾸덕한 바스크 치즈케이크 정도는 예상 가능한 범주다. 하지만 '크림치즈 김밥'을 처음 만났던 날의 충격은 여전히 생생하다. 지극히 한국적이고 투박한 김밥 속에 슬그머니 자리를 잡고는 자칫 튈 수 있는 재료들을 하나로 모으던 그 유연함이라니. 이 조합을 처음 생각한 '먹천재'의 선구안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였다.
무슨 맛이든, 어떤 성질의 재료든 크림치즈 안에서는 묘하게 각이 무뎌진다. 모나고 날 선 것들을 깎아내기보다, 부드럽게 감싸 안아 결국 근사한 조화를 만들어내는 힘이 크림치즈 안에 있다.
세상은 넓고, 배워야 할 미덕은 크림치즈 쇼케이스 안에도 있었다. 세상이 조금 더 퍽퍽하게 느껴지는 날에는 나도 내 마음 한구석에 크림치즈 한 스쿱 정도는 너그럽게 얹어두고 싶다. 웬만한 자극에는 미소 지으며 "뭐~ 그럴 수 있지"라고 넘겨버리는 그런 눅진하고도 단단한 포용력을 가질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