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함께 해온 애증의 친구 관찰기(記)
저녁 운동을 위해 나선 길이었다. 한 10분쯤 지났을 무렵 하늘에서 둥둥 하얀 눈꽃들이 떨어진다. 길가 옆에는 하얀 눈 뭉치들이 굴러다닌다. 어? 지금 5월인데?? 마치 영화 <가위손>의 한 장면(조니 뎁이 가위손으로 얼음 조각을 만들며 얼음조각들이 흩날리던 그 장면)처럼 5월에 눈이 쏟아진다. 의아해 손을 뻗어 잡아 보니 하얀 솜털이다. 이 솜털의 진원지를 찾아보니 둘러 보니 중랑천 변에 뿌리를 내린 버드나무다. 그것이 버드나무가 내뿜은 꽃 가루라는 걸 인지 하자마자 코에서 콧물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휴지로 코를 틀어막고 생각한다. 아! 알레르기의 계절이 왔구나~
3녀 1남 중 셋째 딸. 난 타고나기를 썩 건강한 아이는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셋째 딸들에게 평생 따라붙는 수식어,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처럼 얼굴이 뛰어나게 예쁘지도, 애교가 넘치지도 않는 그저 평범한 딸이다. 그런 딸에게 먹고살기에 바빴던 엄마, 아빠의 관심을 가져 주는 때는 오직 내가 아팠을 때뿐이었다. 그래서일까? 어릴 때는 잔병치레가 심해 형제, 자매들 중 가장 병원 출입이 잦았다. 여러 잔병 중 가장 끈질기게 따라다닌 인생의 동반자가 바로 알레르기다. 평생 함께 해온 애증의 친구, 알레르기와 함께 걸어온 내 인생을 되돌아본다.
알레르기라는 걸 처음 인지한 건 이미 유아+아동기였다. 동네에서 소문난 울보였던 나는 울고 나면 괴물처럼 변했다. 눈물이 흐른 자국 그대로 오돌토돌 두드러기가 올라왔다. 눈물 알레르기 였다. 내가 울 때마다 언니들은 이런 내 모습을 놀리기 바빴고, 그게 서러워 더 큰 소리로 울었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알레르기의 심각성을 잘 몰랐다. 괴물처럼 변하는 모습이 싫어 점점 눈물을 꾹 참았고 하루 하루 커갈수록 눈물을 흘리는 날들은 줄어들었다. 덩달아 눈물 알레르기도 사라져 갔다.
고등학교 때는 알레르기성 비염이 찾아왔다. 늘 머리가 띵 했고, 콧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알레르기성 비염의 가장 큰 폐해는 집중력, 학습능력 저하다. 고등학교 시절, 내 책상 위에는 두루마리 휴지를 위한 지정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상태가 심할 때는 양쪽 코를 다 틀어막는 쌍 휴지 전법까지 동원되기도 했다. 부모님은 성적 하락의 원흉으로 알레르기성 비염을 꼽았지만, 실은 내가 알레르기성 비염을 핑계로 공부를 설렁설렁했음을 인정한다. 그렇게 알레르기라는 좋은 변명거리가 생겼다 좋아했던 철없던 시절의 나는 몰랐다. 이 알레르기성 비염 때문에 평생 눈물 콧물 쏟게 될줄은...
알레르기성 비염이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고 여기에 옵션으로 새로운 알레르기가 더 내 인생에 무임승차 한 것은 대학 졸업사진을 찍던 날이었다. 하루 종일 학교의 명소 곳곳을 몰려다니며 졸업 사진을 찍었다. 점심때 밥을 먹고 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친구들이 나를 보고 놀라기 시작한다. “어? 너 발등 왜 그래? 팔은?? 어 얼굴까지 그렇네??” 그전까지만 해도 온종일 햇빛을 받으며 쏘다니느라 좀 타서 화끈 거리는 줄 알았다. 근데 자세히 보니 햇빛을 받은 피부에 수포가 올라오고 있었다. 놀라서 얼른 피부과로 직행했다. 의사 선생님은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내리셨다. “햇빛 알레르기네요. 무조건 긴 옷, 모자! 자외선 차단에 신경 쓰세요” 그 이후 나의 20대는 어둠에 갇혔다. 그늘천국, 햇빛지옥의 인생이었다. 전 인생을 통털어 몸매의 황금기인 20대 때 동남아 여행도 할 수가 없다. 20대 중반에 욕심내서 딱 한 번 파타야에 간 적있다. 비키니 인증샷 건지겠다고 고작 30분 해변에서 있었다. 그리고 난 다음날까지 꼬박 하루를 호텔에 자체 감금되었다. 온몸에 올라온 발진이 잦아들 때까지 바깥 외출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더이상 내 인생의 비키니샷은 없었다. 내 알레르기 인생에 가장 잔혹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30대 무렵이 되니 잔인했던 그 녀석, 햇빛 알레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찾아온 녀석이 인사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대신 불쑥 찾아와 내 몸과 정신을 피폐해지게 만드는 더 강력한 녀석이 있었다. 때는 몇 해 전, 중국에서 일을 할 때였다. 어느 날부터 입술이 퉁퉁 붓고, 얼굴이 간질간질했다. 중국 병원에 가는 게 썩 내키지 않아 휴가차 한국에 갈 때까지 2주를 참았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에 가니 의사는 별 심도 깊은 진료도 하지 않고 “딱 보니 음식 알레르기네요. “라고 한다. 나도 의심 없이 한 달치 약을 받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있는 동안은 약을 먹어서 인지 증세가 잦아들었는데 중국에 돌아오니 다시 악화되었다. 이런저런 검사를 하니 현지 의사는 곰팡이, 먼지 알레르기라고 한다. 아~제길! 호텔이 이 원흉이었구나!! 또다시 한 보따리의 약을 처방받고, 호텔로 돌아왔지만 약을 먹어도 증세는 악화만 됐다. 결국 응급실 신세까지 졌다. 마지막 병명은 알레르기약 쇼크! 평생 내 인생의 발목을 잡는 알레르기가 결국 나를 타국 땅의 응급실까지 오게 하는구나 서러움에 복받쳐 펑펑 눈물을 쏟았다. 듣지도 않는 중국 약도 싫고, 곰팡이 & 먼지 콤보가 가득한 중국 호텔방도 싫고, 내 돈 주고 다른 숙소로 옮긴다고 하는데 옮기지도 못하게 하는 중국 관계자들도 싫고, 중국 땅의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일주일을 앓고 난 후, 조금씩 기력을 회복했다. 한 달 후엔 다시 무사히 한국으로 복귀했더니 그 증상들은 말끔히 사라졌다.
이렇게 타국 땅에서 알레르기가 발생하면 참 난감하다. 알레르기의 역습에 제대로 당한 건 크리스마스를 맞아 지인들과 함께 떠난 2박 3일 도쿄 여행 때였다. 첫날은 저녁때쯤 도쿄에 도착했기 때문에 특별한 증상이 없었다. 문제는 여행 둘째 날! 야심 차게 하루 종일 시모키타자와 빈티지샵 구경 - 히비야 공원 크리스마스 마켓 둘러보기 - 롯폰기 일루미네이션 인증샷 찍기 - 신주쿠 백화점에서 크리스마스 파티 음식 쇼핑으로 이어지는 크리스마스 특별 코스를 돌 때였다. 아침부터 코가 근질근질하다 싶었는데, 숙소 밖에 나가자마자 연신 재채기가 나기 시작했다. 당연히 콧물, 눈물 세트는 필수옵션이다. 대화를 할 수가 없을 정도였고, 쉴 새 없이 기침이 나왔다.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주변 현지인들의 시선이 따갑다. 결국 약국에 가서 상태를 말하니 사탕 같은 약을 주었다. 사탕모양의 약을 먹으면 기침은 잦아들었지만 그것이 입안에서 사라지면 귀신같이 재채기가 나왔다. 약을 다 먹었는데도 재채기는 잦아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아무 사탕이나 사서 계속 입에 넣고 겨우겨우 재채기를 막는데 힘을 썼다. 그렇게 나머지 1박 2일을 재채기와 콧물과 씨름하느라 크리스마스 여행은 엉망이 되었다. 귀신같이 또 한국에 도착하니 멀쩡해진 내 상태를 보고 여행 동반자들은 결론을 내렸다. 너의 증상은 아무래도 사람 많고, 먼지 많은 <도쿄 알레르기>! 하다하다 도쿄 알레르기라니~! 알레르기 파워에 두 손 두발 다 들었다. 알레르기 때문에 망친 크리스마스 여행의 여파일까? 내 인생에 자의로 다시 도쿄에 갈 일은 없지 싶다.
내 인생에 이미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알레르기. 알레르기 예방에 좋다는 작두콩차, 면역력 강화에 좋다는 홍삼, 마늘 등등 이것저것 먹어 봤지만 기적 같은 효과는 없다. 그저 플라시보 효과 정도? 위의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난 알레르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알레르기란 놈은 발목 잡아서 개과천선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왜냐? 그들은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존재니까... 알레르기 인생에 완쾌는 없다. 그저 잠시 잦아들 뿐... 또 다른 형태의 알레르기가 찾아올 것이다. 그래서 힘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언제 어디서 눈물과 콧물이 쏟아질지 모르니 휴지와 알레르기 약을 파우치에 챙겨 다니는 것뿐이다. 이것이 바로 大알레르기느님에 대처하는 일개 인간의 소소한 몸부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