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신변잡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사 May 08. 2018

전, 이대로도 괜찮습니다만

나의 결혼 여부가 왜 누군가의 걱정거리가 되어야 하는 걸까?

          



오랜만에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어떻게 지내? 별일 없지?”     

 

“응 그럼 별일 없지. 너는 잘 지내?”     


“야 근데 이제 좀 별일 있어야 하지 않아? 나이도 있고 말이야...”    


“음... 그래... (이하 자체 생략).”    


몇 초간의 정적이 말해주는 다양한 뜻을 간파했는지 지인은 스윽 화제를 돌렸다. 별 시답잖은 이야기로 채우고 어영부영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끝낸 내 마음에 씁쓸함이 밀려온다. 분명 나는 내 몫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중이다. 그런데 결혼ㆍ연애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왜 내 삶이 불완전한 것으로 치부될까? 나의 결혼 여부가 왜 누군가의 걱정거리가 되어야 하는 걸까?     

실로 별일 없는 날들이다.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운동을 한다. 가끔 사람들을 만나고, 커피를 마신다. 특히 요즘 열중하고 있는 것은 글 쓰는 습관을 몸에 스미게 노력 중이다. 특별히 아픈 데는 없고, 건강하게 다이어트를 진행 중이다. 몸은 가벼워졌고,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런데 한 번씩 이렇게 훅하고 나의 평화로운 일상을 깨는 자들이 있다. 상대의 말에 내가 느낀 불편함 혹은 불쾌함을 표현하면 으레 히스테리, 콤플렉스, 까칠, 예민라는 단어들로 다시 나의 손과 발을 묶고 입을 막아 버린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오면 늘 옅은 미소와 무심한 표정으로 대화의 끝을 맺는다. 말을 더 이상 섞지 않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한다.      


사실 그들이 던지는 한마디는 오지랖이라는 말로 넘어가기엔 나에게 미치는 내상이 깊다. 내 결혼 여부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결혼을 안 하고 늙어 가면 “날 걱정해 주던 당신”이 날 부양할 것인가? 아니다. 내가 결혼을 안 하고 병이 들면 “날 걱정해 주던 당신”이 날 간호할 것인가? 아니다. 내가 결혼을 안 하고 세상을 뜨면 “날 걱정해 주던 당신”에게 내 (얼마 없는) 재산을 증여할 것인가? 아니다. 내가 결혼을 안 하고 빚을 남긴 채 죽으면 “날 걱정해 주던 당신”이 내 대신 빚을 갚아 줄 것인가? 아니다. 내가 결혼을 안 하고 죽으면 “날 걱정해 주던 당신”이 나의 제사를 지낼 것인가? 아니다.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날 걱정해 주던 당신”에 비해 내가 혜택은 많이 받고 세금을 덜 내는가? 아니다.     


친구라는 이유로, 지인이라는 이유로,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 해서 '걱정'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로 타인의 인생을 마음대로 재단할 권리는 없다. 내가 하고 싶으면 당신이 말려도 나는 할 것이고, 내가 하기 싫으면 당신이 떠밀어도 안 할 것이다.     


어디 결혼 여부뿐일까? 그다음 인생의 질문들은 끝이 없이 이어진다. 아이는? 성적은? 취업은? 차는? 집은? 노후 준비는? 몇 살에는 뭘 해야 하고, 얼마를 모아야 하고, 최소 몇 평 정도에는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르듯 사정이 다르고, 상황이 다른데 왜 인생의 정답은 하나인 것처럼 말할까?


전 생애에 걸쳐 선을 넘는 무례한 인간들을 많이 봐왔다. 그들의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그게 정이고, 또 그게 다 너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이라고 했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얘기라고 했다. 이제 그 걱정들을 정중히 거절하고 싶다. 세상의 모든 오지라퍼들. 남 걱정 마니아들에게 전하고 싶다.     


제 걱정은 사전 결제 후 가능합니다. 선입금 부탁드립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