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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May 18. 2018

여행지의 아침을 열어준 식사들

오늘도 전쟁터 같은 직장으로 향하게 하는 원동력




눈을 뜨면 시작되는 하루. 매일 똑같은 그 아침이 유독 기다려지는 날이 있다. 바로 여행지에서 맞이하는 아침. 그것은 늘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보통 여행지에서는 일찍부터 눈이 떠지는 편이다. 또한 하루 종일 밖에서 에너지를 쓰기 때문에인지 아침 식사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평소보다 크다. 여행지의 아침을 더 즐겁게 만들어 준 아침 식사들을 되짚어 본다.     



저렴한 가격과 최고의 위치를 겸비한 호스텔이나 게스트 하우스는 늘 세계 각국에서 온 가난한 여행자들로 북적인다. 다양한 개성만큼 여행 스타일, 사이클도 다르기에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자긴 하지만 누가 이곳에 함께 묵는지 좀처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아침 식사 때면 이곳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묵고 있나 싶을 정도로 많은 인원이 모인다. 아침이면 반짝 여는 도깨비 시장처럼, 조식을 먹는 곳엔 다양한 사람들이 북적인다. 나도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보통은 시리얼, 우유, 커피, 주스, 잼, 식빵, 약간의 과일 정도가 마련되어 있고, 운이 좋으면 달걀이 들어간 그럴싸한 샌드위치를 배식하기도 한다. 오사카의 여성 전용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장은 그 소녀소녀 한 품성을 닮은 순정만화 같은 조식을 내주었다. 제주도의 게스트 하우스에선 따끈한 순두부와 제주식 장아찌, 상큼한 해초 무침을 내주었다. 후식으로 귤까지 먹고 나면 제주의 정취를 작은 아침상에서 느끼기 충분하다. 한 그릇의 소박한 호스텔 또는 게스트 하우스의 아침 한 끼는 또다시 시작될 여행자의 든든한 에너지원이다.        



일명 “잘 사는 나라”에서 호스텔, 게스트 하우스만 전전하던 가난한 여행자도, 동남아시아에 오면 선택지가 많아진다.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시설 좋은 호텔, 리조트에 묵는 호사를 누릴 수도 있다. 빡빡한 일정을 짜지 않고 오롯이 리조트에서의 휴양만을 계획했던 베트남 무이네의 리조트는 보급형 지상낙원이었다. 먹고 수영을 하고 낮잠을 자고 다시 먹고 자고를 반복했다. 매일 아침 6시 반에서 7시 정도면 아침을 먹으러 갔다. 해가 지면 별달리 할 게 없는 리조트의 특성상 일찍 잠자리에 들었기에 아침에 눈이 일찍 떠진다. 무엇보다 메뚜기 떼처럼 한번 지나가면 남김없이 쓸어가는 시끌벅적한 중국인 관광객들의 습격을 피해, 여유롭게 식사를 하기 위한 묘책이었다. 서양식과 베트남식은 기본, 중식, 일식, 한식까지 다양한 메 뉴들이 가득했다. 기본적인 메뉴들 외에 베트남에 왔으니 그곳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 위주로 공략했다. 매일매일 바뀌는 열대과일, 국물 진한 쌀국수, 베트남식 커피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한가롭게 아침식사를 하고 마무리할 때쯤에 귀신같이 테이블로 찾아드는 손님이 있다. 참새를 비롯해 작은 새들이 손님들이 남긴 빵 부스러기라도 먹을까 테이블 주위를 맴돈다. 작은 입으로 조잘조잘 떠들다 부스러기가 떨어진다 싶으면 잽싸게 테이블 아래로 날아와 채간다. 직원들에게는 귀찮은 불청객일 테지만 여행지의 모든 것이 신기한 여행자에게는 이 작은 손님의 방문 또한 낭만이 되었다.  


       


바오밥 나무 거리로 유명한 마다가스카르 모론다바의 오래된 리조트에서 묵을 때였다. 원래 숙박을 할 예정은 아니었는데 피치 못한 사정으로 일이 꼬여 버렸다. 당일 날 어렵게 수배한 숙소에서 1박을 해야만 했다. 최소 지은 지 40~50년은 됐을 오래된 유럽풍 리조트는 금방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듯 으스스했다. 침대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습기 때문에 축축했고, 불안 불안한 전기 사정 때문에 저녁 시간엔 수시로 정전이 됐다. 다시 전기가 들어오면 에어컨 대신 천장에 달린 커다란 실링팬은 돌아갈 때마다 끼익 끼익 원숭이 울음소리가 났다. 덕분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을 설쳤다. 아침에는 정원에서 시끄럽게 우는 이름 모를 새소리에 눈을 떴다.     


전날의 전쟁 같은 일들은 까맣게 잊을 만큼, 모론다바의 아침은 눈부셨다. 체크인때 지배인이 알려준 대로 조식이 마련된 리조트 내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일행들이 모여 아침을 먹고 있었다. 까칠한 몰골을 보니 그들도 나처럼 잠을 설쳤나 보다. 마다가스카르의 프랑스식 귀곡 산장에서 숙면을 취하긴 쉽지 않은 일이다. 잠시 눈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곧 눈이 부시도록 하얀 유니폼을 단정하게 입은 현지인 직원이 내게 다가와 묻는다.     


“Coffee or Tea?”    


"Coffee, Please"    


"Omelette or Scrambled egg?"    


"Omelette, Please. Thank you"    


나머지 빵과 잼, 과일은 알아서 가져다 먹는 스타일이다. 바게트 조각 2개와 약간의 잼을 담아 자리로 와 안으니 금세 커피와 핑크색 구아바 주스를 가져다준다. 바에서 바로 착즙 한 주스다. 커피를 마시기 전에 먼저 구아바 주스를 한 입 마셨다. 상큼한 구아바 주스가 몸으로 퍼지는 순간 아직 잠이 덜 깨 흐리멍덩하였던 신경들이 순식간에 기지개를 켰다. 인심 좋게 내준 두툼한 버터와 각종 잼을 발라 빵을 맛봤다. 마다가스카르가 오랜 세월 프랑스의 지배를 받기도 했고, 프랑스 할아버지가 주인이라더니 리조트의 빵은 프랑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다가스카르를 대표하는 수출품 중 하나라는 커피. 내 앞에 놓인 하얀 잔 안에는 다른 차원의 세계로 향하는 블랙홀처럼 검고 깊은 소용돌이가 치는 커피가 들어 있었다. 조심스레 한 모금 마시자 그 진한 향과 색만큼 뜨겁고 강한 맛을 느껴졌다. 마다가스카르의 땅이 품은 그 에너지를 가득 담고 있는 듯했다.     


곧이어 금방 만들어져 따끈한 오믈렛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포크로 작게 잘라 맛을 본다. 기름을 많이 둘렀는지 한입 씹는데 기름이 쭉 배어 나온다. 몇 입 먹지 않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굳이 그런 오믈렛으로 흐름 좋았던 모론다바의 아침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앉은 채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리조트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몸도 마음도 지쳤던 어젯밤에는 보이지 않았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길게 뻗은 키 큰 야자수, 리조트 바로 앞 모잠비크 해협과 맞닿은 해변,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얼굴에 부딪혔다. 전날 있었던 전쟁 같은 일들을 까맣게 잊게 해 준 마술 같은 아침 식사였다.         




사는데 지쳐 잠에서 깨 눈을 뜨는 아침이 지옥같이 느껴질 때, 생각해 본다. 여행지에서 여유롭게 먹던 아침을 먹던 그 순간을. 기분 좋게 아침을 먹으며 오늘 하루 어떤 여행을 할까? 동선을 계획하는 그 시간을. 그러다 보면 배시시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평범한 일상을 충실히 살아야 또 낯선 여행지에서 아침을 먹을 시간과 돈이 생긴다. 그것은 21세기 노동자의 숙명이다. 그래서 새털 같이 많은 이 평범한 날들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중요하다. 언젠가 맞이하게 될 여행지의 아침 식사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오늘도 전쟁터 같은 직장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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