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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May 25. 2022

이름처럼 그대로 되는 동네책방,잘익은언어들

전주 잘익은언어들 이지선 대표

‘잘 익은 언어들’. 나지막이 읊조릴수록 정이 드는 이름이다. 처음에 생소했는데, 이내 책방 이름으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다 싶었다. 일요일 아침을 달려 도착한 전주 송천동 ‘잘익은언어들’에서 때마침 문을 연 이지선 대표를 만났다. 대형서점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사람 냄새 진하게 풍기는 곳’이 있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잘 익어가는 언어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곳이 있다면 바로 여기, 잘익은언어들이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잘익은언어들

이지선 대표는 광고 일을 오랫동안 해왔다. 광고회사 다니면서 일이 치일 때면 막연히 책방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마침 이런저런 모임에서 우분투북스 이용주 대표를 만났고, 차츰 더 책방 일에 마음이 쏠렸다. 사실 전주에 터를 잡은 건 아토피가 있는 아들을 위해서였다. 그나마 공기 좋고 친정이 있는 전주에 내려와 광고 카피를 열심히 쓰다가, 이내 일을(?) 저질렀다. 2017년 10월 ‘잘익은언어들’의 문을 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주말부부 생활을 해야 하는 남편은 “사장님도 되고 좋네”라며 축하했단다. 물론 이 말도 덧붙였다. “내게 손만 벌리지 말아요.” 웃자고 한 이야기겠지만, 그 짧은 말 안에 기꺼운 마음으로 응원하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리라. 그런 응원이 있으니 이 대표는 “재미있게 즐겁게 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이지선 대표는 “책방 안에 있으면 행복하고, 집에 가면 현실을 마주한다”고 했다. 책방에 있으면 온통 즐거운 일뿐인데, 책방 문 닫고 집에 들어서는 순간 ‘오늘 책이 몇 권 팔렸더라? 그러고 보니 책방에 온 사람이 하나도 없었네’라는, 요즘 말로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온단다. 왜 안 그럴까. 책을 일일이 주문하는 일도 어렵거니와, 까다로운 조건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래도 즐겁게 하려고 노력한다. 사춘기 딸도 엄마 일이 ‘의미 있는 일’이라는 걸 알아주기 시작했고, 아토피가 있던 아들도 이제는 좋아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지선 대표가 재미있게 일하려고 해서인지, 그가 기획한 프로그램들도 재미있다. 한번은 전주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을 해봤으면 싶었는데, 마침 전주문화재단과 연결되어 작은 공간을 꽉 채운 공연 하나를 벌였다. 2019년 여름의 끝자락에 소리꾼 강한나 씨가 「사랑가」를 청중들과 함께 배우며 불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더불어 한국무용가 김선희 씨는 부채춤을, 청소년 춤꿈 박서현 군의 우리 춤 무대도 올려졌다. 

노래방 마이크로 판소리를 들려준 강한나 씨는 “큰 무대에서도 떨어본 적이 거의 없는데, 유독 떨리는 무대였다”고 소감을 들려주었단다. 그러니 늦여름 더위에도 책방에 모인 사람들은 흥겨웠고, SNS를 통해 공연을 본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우리 동네에서도 하면 좋겠다”를 연발할 수밖에. 작은 책방이 들어선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찾아보면, 실제로 해야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많음을 잘익은언어들이 보여준 셈이다. 


전주라는 지역적 특색 때문에 계속 판소리와 우리 춤 무대만 열 수는 없는 법. 이지선 대표는 전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국 비보이의 원조인 ‘라스트포원’ 멤버들의 무대도 기획했다. 전주에 사는 몇몇 멤버들을 부추겨 공연과 토크쇼를 함께 진행했다. 멤버들은 춤에 미쳐 살던 시절 이야기며, 부모님들이 “중학교만 졸업하자”고 읍소했다는 이야기 등을 들려주며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고 한다. 특히 그들과 동년배인 부모들은 공감대가 많았다고 한다. 비보이 공연은 멀지 않은 이웃인 군산 한길문고로도 전파되었다. 이지선 대표는 “책방인지 기획사인지 모르겠다”면서 시원하게 웃었다.    


이지선 대표가 기획사 사장이 아닌 이유가 있다. 책방을 방문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 한번은 앞치마를 두른 한 아주머니가 책방에 들렀다. 책을 한 권 사러 왔다며, 지난 10년간 책을 한 권도 안 읽었으니 마땅한 책이 있으면 추천해 달라고 했다. 오래 고민할 것도 없이 사노 요코의 『사는 게 뭐라고』를 추천해드렸다. 한 달쯤 흘렀을까, 아주머니가 찾아와 이런 말을 하더란다.

 “내가 평생 책은 안 볼 줄 알았는데, 덕분에 한 권 읽게 되었어요. 나도 책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고마워요.” 

알고 보니 아주머니는 책방 앞 만둣집 주방에서 일하시는 분이었고, 서로서로 단골이 되었다. 만둣집뿐 아니다. 책방 앞 옷집 언니도, 책방 옆 미장원 원장도 그렇게 책 한 권씩 읽게 되었다고 한다. 동네에서 책방 하는 맛이 이런 것이구나 싶다. 


이지선 대표는 책방을 열기 전에도, 지금도 카피라이터다. 책방 일과 카피라이터 일 둘 다 집중하지 못하니 고민이 될 때도 많았다. 솔직히 말하면 “책방 일에 집중하고 싶지 카피 쓰는 게 싫다”고 한다. 그럼에도 책방의 자립을 위해서는 당분간 이 일을 해야만 한다. 

이유는 다 아는 그것 때문이다. 책방 일에 집중하다 보면 마감을 못 맞춰 줄 때가 많다. 광고 일이 분초를 다투는 일 아니던가. 그럼에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책방 일이 고되지?” 하며 넉넉하게 이해해준다고 한다. 민폐이니 접자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가능한 마감을 지켜서 ‘책방 일 더 잘하려고, 카피도 열심히 쓴다’는 소리가 듣고 싶다고 한다. 그게 결국 잘익은언어들의 이름에도 걸맞은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지선 대표는 공간이 조금 더 넓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판소리 무대도 비보이 무대도 해봤으니 공간에 대한 욕심이 없을 수 없다. 월세 안 내는 단독 2층 건물을 꿈꿔보기도 하지만 지금은 언감생심. 그래도 돈 안 드는 일이니 꿈꾼다. 오래된 유행어지만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가끔 믿기 때문이다. 잘익은언어들은 이름 그대로 느리지만 잘 익어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또 어떤 생각들이 영글고 익어갈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열매는 무척이나 크고 달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다시 전주에 갈 때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있으리라 기원한다.


장동석_출판평론가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0년 3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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