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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Oct 10. 2022

거인의 정원

관대한 사랑이 머무는 곳

‘너의 이야기를 들어줄게.’
나에게 부드럽게 속삭여요. 
나는 망설임 없이 지치지 않고 말을 이어갔어요. 
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있으니까요.
별이 빛나고 있었고, 흙은 따뜻했어요.   


거인의 정원 

최정인 글·그림 / 56쪽 / 21,000원 / 브와포레


몇 년 전에 낯선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잠시 지낸 적이 있었어요. 마을 안에서는 자동차가 다니지 않았고, 밤이면 별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지낸 시간은 행운이었지요. 자연 속에서 에너지 넘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 경험은 그림을 그리는 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작업한 그림책 『라 벨라 치따』 『빨간 모자의 숲』 등에서도 이 시기의 기억과 감동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생활이 그저 장밋빛만은 아니었지요. 저는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어를 배우고는 있었지만 단숨에 잘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 나라 말을 잘하지 못해 수줍고 소극적으로 행동했습니다. 제가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제한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바라볼 때 조심스럽게 경청했지만, 저는 무엇에도 서투른 작은 아이가 된 기분이었어요. 그리고 가끔은 말을 하지 않는 편을 선택하기도 했지요. 시간이 흐를수록 저는 ‘내가 기억하는 나’와는 조금 다른 ‘나’가 되어갔어요. 그렇게 힘들고 지칠 때는 푸른 자연을 찾았습니다. 숲속에 홀로 있을 때는 편안함을 느끼면서 온전히 생각에 잠길 수 있었거든요.

『거인의 정원』은 그렇게 낯선 도시의 작은 소녀가 느끼는 고독과 소외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유난히 기운이 빠진 어느 날, 저는 멋진 친구를 알게 되었어요. 저 멀리 멕시코에서 날아온 로베르토라는 친구였어요. 그는 아주 거대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어요. 키도 크고, 몸집도 컸지요. 처음에 그를 볼 때는 조금 긴장을 하기도 했던 거 같아요. 로베르토는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해주었어요. 그리고 상냥하게 서툰 제 이야기를 들어주고 끄덕여주고 환하게 웃어 주었습니다. 그 웃음이 얼마나 빛나던지…. 그 모습을 바라볼 때 제가 느낀 감정은 경이로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로베르토에게는 타인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특별한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되었어요. 속셈 없는 그의 친절은 인간이 갖기 힘든 아름다운 관대함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저는 활기를 찾았습니다. 

제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주는 단 하나의 존재, 그것만으로도 세상의 빛깔이 달라졌습니다.

거인, 그것은 이 세상을 멀리서 바라보는 절대자의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때때로 그것은 제자리에서 시간을 맞이하는 너른 품의 자연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조용히 아이의 성장을 기다리는 인내심 있는 현명한 양육자일 수도 있습니다. 

거인은 진심으로 당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존재입니다.

로베르토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의 멋진 꽃들과 파란색 시골집 사진을 보여줬습니다. 그 이미지는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이미지들은 강렬하게 다가오는 법이니까요. 특히나 화가에게는 더없이 매력적인 요소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와 그의 세계를 판타지 속으로 집어넣었습니다. 바로 이 책에 나오는 파란 거인의 집과 정원이 그것이지요.


그날 숙소에 들어와서 그 기분을 바로 드로잉으로 옮겼습니다. 거대하고 따뜻한 존재의 보살핌과 격려를 받는 소녀를 그렸습니다. 저의 그림책 작업은 언제나 한 장의 드로잉에서 시작되곤 합니다. 저는 이것을 얽히고설킨 이미지의 실타래에서 삐죽 나온 한 오라기 실을 잡아당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줄줄이 끌려 나오는 이미지들을 눈으로 확인하는 작업은 작가 스스로에게도 황홀한 경험입니다. 독자 여러분에게도 이 책이 아름다운 거인의 정원으로 향하는 안내서가 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최정인 작가는 대학에서 판화를 공부하고 줄곧 어린이책에 그림 그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린 책으로는 『라 벨라 치따』 『빨간 모자의 숲』 『다녀왔습니다』 『기린을 만났어』 등이 있고 전래동화를 그림책으로 재해석한 『바리공주』 『견우 직녀』를 작업했습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2년 3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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