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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Oct 12. 2022

‘선’을 통해 읽는 그림책

깊이 읽는 그림책 세계 1

그림책읽기는 글과 그림 사이를 계속해서 오가야 하는 순환적인 읽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책의 물성도 놓치지 않아야 할 서사적·미학적 요소로 자리 잡는 경우가 흔하다. 글에 익숙한 독자라면 글이 먼저 눈에 들어올 것이고, 그림을 선호한다면 그림이 먼저 눈을 사로잡을 것이다. 텍스트를 먼저 읽든 일러스트레이션을 먼저 보든 상관없다. 먼저 읽은 텍스트에서 정보를 얻은 후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넘어가서 다른 정보를 얻고서 비교하고 종합하면서 의미에 다가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읽었거나 보았던 부분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이처럼 텍스트와 일러스트레이션 사이를 왕복하는 읽기를 통해 더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의미에 도달한다. 그래서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일러스트레이션은 단지 ‘보기’의 대상의 아니라 ‘읽기’의 대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글작가가 문자 기호를 통해 서사 세계를 펼쳐가듯이, 그림작가는 시각 기호를 통해 이야기 세계를 구축한다. 글작가가 이전 혹은 동시대 문학의 토대 위에서 창작을 하듯이, 그림작가는 시각예술의 전통과 규범에 뿌리를 두고서 자기 나름의 독특하고 참신한 시각적 서사 세계를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독자는 해당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면서 수동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자신의 배경지식을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의미를 형성해간다. 다시 말해 이미지의 이해는 수용자가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동원하여 의미를 구축해가는 행위이다. 그런 만큼 독자가 분석적인 눈을 갖고 있다면 일러스트레이션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자의 지식이 깊고 넓고 견고할수록, 해당 이미지를 맥락 안에서 더 정교하게 읽어내는 재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림책에서 시각적 구성 요소가 어떻게 의미 작용을 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나름의 ‘시각적 목록 체계’를 제시하는 이론가들도 있다. 여러 목록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요소는 선, 색, 프레임/프레이밍, 등장인물/사물의 공간 배치 등이다. 이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선’이 아닐까 싶다. 선은 형태를 이루고 재질감 등을 표현함으로써 이미지를 구성할 뿐만 아니라, 서사 차원에서 의미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라우어와 펜탁은 『조형의 원리』에서 

“선은 단지 사물의 외곽이나 경계선 이상의 것이다. (…) 선은 무한한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 따라서 이것은 화가들에게 극히 표현적이 아닐 수 없다. (…) 이러한 기본적인 요소로 나타낼 수 있는 암시적인 힘은 매우 큰 것이다”

라고 하였다.


선의 서사적 의미

선은 직선인지 곡선인지, 연속선인지 파선인지, 수평선인지 수직선인지, 대각선인지에 따라, 실선인지 점선인지에 따라, 굵기에 따라 다양한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직선은 좀더 분명하고 딱딱한 느낌을, 곡선은 좀더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흐르는 듯한 느낌을 표현한다. 수평선은 편안함, 균형, 고요함을 느끼게 하고, 수직선은 성장, 엄격함, 안정감, 감금, 강함을 느끼게 한다. 대각선은 불안감이나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이런 일반적 상징성도 중요하지만, 선이 특정 작품의 서사에서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가령 수직선과 수평선의 시각적 대조는 앤서니 브라운의 『공원에서 일어난 이야기』에서 서사적 차원의 대립 효과로까지 이어진다.

ⓒ삼성출판사(『공원에서 일어난 이야기』)

네 명의 화자가 각자 자신의 관점에서 공원의 산책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 흥미로운 그림책에서 수직선과 수평선은 공원 벤치의 등받이와 가로등에 숨겨져 있다. 

[그림1]에는 찰스와 찰스 엄마가 공원 벤치에 앉아있는데 벤치 등받이는 수평으로 끊어짐 없이 이 두 인물을 이어주면서 이 둘이 단절된 관계가 아님을 암시한다. 

[그림2]에서는 스머지의 아빠와 찰스의 엄마가 나오는데 두 인물은 화면을 수직으로 분할시키는 가로등에 의해 그 관계가 단절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3]은 벤치에 앉아있는 찰스와 스머지를 보여주는데 [그림2]의 가로등과는 달리 [그림3]의 가로등은 벤치의 등받이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끝이 난다. 즉 이 꼬마들의 관계는 수평으로 이어진 벤치 등받이가 보여주듯이 단절로 끝나지 않고 이어지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수평선과 수직선은 단순한 ‘선’의 형태가 아니라 배경 속의 사물들을 통해 표현되어 있으며,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가느다란 선 자체가 배경 속에 스며들어 서사 전개에 중요한 요소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수지의 『파도야 놀자』는 바닷가에서 한 소녀가 현실 세계와 상상 세계를 오가며 노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펼침면의 편집 선이 현실 세계와 상상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으로 활용되긴 하지만, 두 세계의 나누어짐을 슬며시 보여주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펼침면을 상하로 나누는 지평선과 수평선인 가로선이다. 왼쪽 면의 지평선이 오른쪽 면의 수평선으로 이어지는 펼침면들에서는 소녀의 세계가 단절 없이 하나의 세계로 보이지만, 소녀가 오른쪽 면으로 넘어가 파도와 함께 노는 정점의 순간을 보여주는 펼침면에서는 왼쪽 면에만 지평선이 있고 오른쪽 면에는 수평선이 없어진 상태이다. 이제 하나의 공간이 아니라 두 개의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음을, 편집 선(보이지 않는 세로선)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가로선(지평선, 수평선)을 통해서 암시하는 것이다.

ⓒ비룡소(『파도야 놀자』)

한편 조형적 요소인 ‘선’이 등장인물로 나오는 작품도 있는데, 데보라 보그릭과 피아 발렌티니스의 『직선과 곡선』이 그 예이다. 직선과 곡선은 각자 자신들이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지 그 존재 이유를 보여준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분명하고 딱딱한 느낌을 주는 직선과 자유롭고 개방적이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곡선이 우리의 삶 속에서, 주변 환경 속에서 서로 다른 특성으로 인해 경쟁하고 갈등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다. 이처럼 일반적인 직선과 곡선의 특성을 바탕으로 조형적 요소인 선을 등장인물로 삼아 이질성이야말로 다양하고 조화로운 세상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임을 보여준다.

ⓒ브와포레(『직선과 곡선』)


선으로 그리는 자유로운 글쓰기

선은 어떤 종류인지에 상관없이 현대 그림책에서 종종 마주치게 되는 메타픽션이라는 서사 장치로 사용될 수도 있다. 이수지의 『선』에서는 얼어붙은 연못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한 소녀가 스케이트 날로 마치 음표를 그리듯이 얼음 표면에 선을 이리저리 그려나간다. 그런데 소녀가 스케이트를 타다가 점프를 하던 중에 넘어지자, 갑자기 연못은 사라지고 구겨진 종이와 연필, 지우개가 등장한다. 소녀의 스케이트 날이 그려내고 있던 선이, 실상은 누군가의 연필 끝에서 나온 것이었다. 연못 위의 ‘선’이 소녀의 스케이트 날의 끝에서 나오지만 누군가의 손끝으로 그려진 ‘선’임을 보여줌으로써, 소녀의 세상은 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 세계임을 알려준다. 또한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리버벤드 마을의 이상한 하루』에서도 마을을 뒤덮는 무서운 선이 실상은 크레용을 쥔 한 아이의 손끝에서 나온 선과 연결되면서, 선이 리버벤드 마을이 허구 세계임을 드러내는 장치로 활용된다.


선은 종류에 따른 일반적 의미를 따라 그림책에 사용되거나, 이미지를 구성하는 조형적 요소로만 활용될 수도 있지만, 예를 통해 살펴본 것처럼 특정 의미를 내포하거나 서사장치로 기능할 수도 있다. 2010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을 받은 벨기에 그림책작가 키티 크라우더가 

“하나의 선에서 시작해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 선은 에너지이며 자유의 공간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선이 연필, 붓, 잉크로 만들어내는 그림은 (…) 자유로운 글쓰기이다. (…) 각자 자신만의 음색이 있듯이 각자 자신만의 선이 있다”

라고 말하였듯이, 선은 기본적인 시각적 요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 고유의 표현 수단으로 서사 장치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성엽 선생님은 그림책 연구와 번역을 하며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림책 이론서 『그림책, 해석의 공간』을 썼습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2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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