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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Oct 14. 2022

‘색’을 통해 읽는 그림책

깊이 읽는 그림책 세계 2

1919년 프랑스에서는 화가인 에디 르그랑이 자신의 첫 어린이 그림책을 내놓았다. 『마카오와 코스마주, 또는 행복의 경험(Macao et Cosmage, ou l’expérience du bonheur)』이라는 제목의 이 그림책은 ‘아르데코’의 영향을 보여주는 일러스트레이션을 통해 그림책에서 시각적 요소의 힘을 보여주면서, 프랑스 그림책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 책을 시작하며 에디 르그랑은 자신의 어린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얘야, 앞으로 나올 페이지에서는 색, 가장 사소한 물건, 아주 작은 동물도 모두 존재 이유가 있단다…. 그 이유를 발견하는 것은 네 몫이야. 자세히 살펴보렴.”


작가의 이 당부를 보면, 색은 단지 이미지를 구성하는 시각적 요소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 이유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아동문학 이론가 장 페로(2008)도 

“색은 책읽기에서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이며, 다른 아동문학 장르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림책에서도 핵심적인 요소”

라고 말한다.


색은 빨강, 노랑 등의 따뜻한 계열 색과 파랑, 녹색 등 차가운 계열의 색으로 나뉘어져, 전자는 애정, 열정, 기쁨 등을 환기시키며 후자는 평온함, 차분함 등을 환기시킨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그림책에서는 이 같은 도식적 구분만으로는 색이 내포한 의미를 모두 파악할 수 없다. 색은 다양한 색의 결합이나 대조를 통해 전반적 서사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주제를 표현하기도 하며, 등장인물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해당 그림책의 서사 맥락 안에서 색을 세밀하게 해독해낸다면 책읽기의 재미가 더해질 것이다.


이야기의 주제와 연결되는 색의 장치

제목에 색이 들어간다면 그 색이 특별한 의미를 띨 가능성이 있다. 책을 펼치기도 전에 이 색의 의미가 무엇일까 궁금해질 것이다. 라스칼이 글을 쓰고 클로드 뒤브아가 그림을 그린 『빨간 아기토끼』를 보면 제목에 ‘빨간’이라는 색 형용사가 포함되어있다.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빨간’ 토끼의 존재에 독자는 호기심을 갖게 될 것이다.

평범하게 태어난 아기 토끼는 어느 날 빨간 페인트에 빠지게 되면서, 그 빨간색을 지울 수 없어서 빨간 아기 토끼가 되고 만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아기 토끼의 운명은 그 색을 통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옛이야기 『빨간 모자』의 꼬마 여주인공과 이어지게 된다. 빨간 아기 토끼는 엄마 토끼의 심부름으로 아픈 할머니 토끼의 집으로 가는 길에, ‘빨간 모자’를 만나게 된다. 이 둘은 서로가 상대방의 운명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되고, 그 운명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옛이야기의 결말을 바꾸어버린다. 이처럼 아기 토끼의 ‘빨간색’은 옛이야기 『빨간 모자』와의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서사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제목에 색 명사나 형용사가 포함되어있지 않더라도 색이 그림책의 주제와 연결될 수 있다. 안 에르보의 『쉿, 조용!』은 침묵, 휴지(休止), 쉼표가 말이나 글만큼 의사소통에서 중요함을 보여주는 그림책이다. 이 작품에서 침묵과 휴지, 쉼표를 상징하는 인물은 주인공 ‘조용왕자’이다. 그런데 이 왕자는 모자, 옷, 신발까지 모두 흰색이다. 조용왕자는 부왕으로부터 왕국을 조용히 시키고 백성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하라는 명을 받아 그대로 행한다. 그러다 보니 마음껏 말하고 싶었던 백성들은 조용왕자를 싫어하게 되고, 결국 부왕이 서거하자마자 조용왕자를 추방해버린다. 

하지만 백성들은 쉼도 없이 자신들이 막무가내로 말을 쏟아내어서 상대방의 말을 듣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을 깨닫게 된다. 서로를 연결해주는 의미 있는 ‘말’이 아니라, 서로를 소외시키는 시끄러운 ‘소음’만이 왕국에 가득하게 된 것이다. 비로소 백성들은 상대방이 말하는 동안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침묵이 바로 의사소통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침묵’의 상징인 조용왕자를 왕국으로 다시 불러들인다. 그런데 침묵을 상징하는 조용왕자는 온통 흰색으로 표현되어있고, 소리와 시끄러움을 상징하는 백성들은 다채로운 색들의 옷을 입고 있다.

색색의 옷을 입은 채 빈틈없이 엉켜있는 백성들 중에서 몇 명이 떨어져 나와 조용왕자를 다시 부르고 있는데, 이들의 옷도 흰색으로 변한다. 조용왕자가 돌아오자 백성들 사이에 흰색 틈이 생겨나게 되고 서로 행복하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이 그림책은 끝을 맺는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흰색’은 말이나 글에서 메시지 전달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침묵, 멈춤, 띄어쓰기, 쉼표 등을 의미함으로써 이 이야기의 주제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색의 대조, 심적 변화와 다른 세계 표현

특정 색이 아니라 전체적 색들의 대조를 통해 등장인물의 심적 변화를 표현하기도 한다. 앤서니 브라운의 『공원에서』는 네 명의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스머지의 아빠는 일을 찾는 구직자여서 마음이 울적한 채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빠는 기분 전환을 위해 딸과 함께 공원으로 산책을 나선다.

ⓒ웅진주니어(『공원에서』)

[그림 1]은 집에서 공원으로 가는 길이며, [그림 2]는 산책을 마치고 공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림 1]은 전체적으로 채도가 낮고 어두운 노랑과 갈색을 통해 어두운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이는 스머지 아빠의 울적한 내면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그림 2]는 밝고 선명한 색들이 주를 이루며, 건물의 창문도 [그림 1]과 달리 빨강, 노랑, 파랑 등으로 가득하다. 이런 색의 변화는 스머지 아빠의 심적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 색조의 대조는 심적 변화 외에도, 서로 다른 두 세계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수지의 『동물원』은 한 꼬마가 아빠, 엄마와 함께 동물원에 가지만, 그날따라 동물원 우리에 동물들이 한 마리도 없는 실망스러운 상황이다. 그런데 신비한 공작을 쫓아간 이 꼬마의 눈에 비친 세상에는 자유롭고 재미있게 지내는 동물들이 가득하다.

ⓒ비룡소(『동물원』)

[그림 3]과 [그림 4]에서 볼 수 있듯이, 이 꼬마의 환상세계와 현실 세계의 대조가 색을 통해 표현된다. 동물들이 없는 현실 세계는 거의 무채색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꼬마가 즐겁게 놀고 있는 환상세계는 유채색으로 선명하게 표현되어있다. 이처럼 두 개의 세계가 얼마나 다른지 색채의 대조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의 이행, 혹은 두 세계의 이질성이 전체적 색채의 대조를 통해 표현된 경우는, 대브 필키의 『When Cats Dream(고양이들이 꿈을 꿀 때)』라는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고양이가 깨어있는 현실 세계는 흑백 일러스트레이션이지만, 고양이가 잠들어서 보게 되는 꿈속의 세계는 컬러 일러스트레이션이며, 그림 스타일도 달라진다.


마지막으로, 카트야 캄의 『안보여요안보여』는 색의 대조를 통해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글 없는 그림책이다. 언어유희처럼, 색을 통한 유희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소년이 모래사장에서 다른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장면이 나온다. 웃통을 벗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 페이지를 넘기게 되면 바탕색이 보라색인 면에 소년이 다시 등장하는데, 소년의 웃옷이 모래사장의 색과 일치하는 색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이때 이 소년 앞을 수녀님들이 지나가는데, 몸과 팔다리는 보이지 않고 얼굴, 손, 발만 보인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게 되면 바탕면이 진한 주홍색이고 수녀님들이 보라색 옷을 입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 책은 말에 기반한 언어유희처럼 색에 기반한 색채 유희를 통해 재미를 주는 그림책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색은 단지 일러스트레이션을 구성하는 시각적 요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사 장치나 유희 장치로 활용되기도 한다. 또한 주제나 등장인물의 심리를 드러내 보여주기도 하며, 서사에 등장하는 서로 다른 세계들, 특히 현실 세계와 환상세계의 대립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퀀틴 블레이크는 “색의 문제에 대한 고민 없이 어린이책 일러스트레이터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Boulaire, 2018 재인용)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성엽_『그림책, 해석의 공간』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2년 4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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