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가드를 올리고

작업실에서 만난 젊은 작가 - 고정순

by 행복한독서

“넘어지는 일 하나는 끝내주게 잘한다. 하지만 일어서는 것은 여전히 힘겹다. 때때로 나를 일으켜 준 이름 모를 권투 선수에게 이 책을 보낸다. 오늘도 일어서는 당신에게도.”


작가 고정순은 『가드를 올리고』 후기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어쩌면 지난 연대의 그림책들에 종언을 고하는 간략한 메시지 같은 글이다.


그동안 어른들은 모든 어린이에게 명작 동화와 옛이야기 그리고 친절한 그림책을 통해 즐거움을 준다는 게 정해진 규칙 같았다. 고귀한 명분의 어린이 그림책은 여기서 방향을 바꾼다. 내 그림책은 모두에게로 간다로. 나이와 성별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간다. 그 서막을 올린 작품이 바로 『가드를 올리고』다.


사람들은 살면서 무수히 쏟아지는 잔 펀치를 피하다 지쳐 가드를 내렸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링 로프에 매달려 버티다 겨우 다시 일어서서 상대와 마주 서야 했던 일들도 겪는다. 가드를 올리지 않은 링 위의 선수는 이미 절망적이다. 권투는 링 위에서 싸울 상대가 분명 있지만 사람이 사는 일에는 그렇지 않다. 고군분투하다 쓰러지기도 한다.

가드를올리고.jpg ⓒ만만한책방(『가드를 올리고』)


그림책이라는 터널을 통과하기 위해 작가는 긴 시간 링 위에 서 있었다. 인생 스무 해를 지나면서 독립한 뒤 마주한 세상의 풍경은 그리 아름다운 곳도 만만한 상대도 아니었을 것이다. 때때로 동물원에서 단기 일자리를 얻어 얼마간 동물들과 지내보기도 했고, 다른 곳에서 깃들일 만한 것을 찾아다녔다. 이 경험들이 얼마 전 출간된 『우리 여기 있어요, 동물원』까지 오게 했는지 모른다.


서울 은평구에 있는 작업 공간은 비 갠 북한산을 보는 것처럼 정갈하다. 어쩌면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지 않으려는 야생동물처럼 깨끗한 모습으로 세상을 지켜보는 눈빛이 그렇다. 크지 않은 아파트를 잠시만 둘러봐도 꼭 필요한 테이블과 작은 책장이 보일 뿐이다. 텅 빈 곳에서 글을 쓰고 그림 구상과 함께 작업에 들어갈 것이다.


한 사람의 작업 세계가 불쑥 나올 수 없듯이 자신도 모르는 새 차곡차곡 쌓여갔을 것이다. 어린 시절 소래포구의 전자오락실에서 들려오던 소리를 매일 익숙하게 받아들여야 했던 때부터 십 대를 보낸 서울의 번화하고 번잡했던 영등포의 거리와 이십 대와 삼십 대를 관통하던 거리, 서대문구 초방이 있던 대신동을 오가던 연남동의 꼭대기 집까지 사람들의 기억에 이르는 모든 곳이 그의 것이다. 특히 짧지 않은 시간을 보냈던 그림책 공간 ‘초방’은 그에게 일터이면서 연마를 위한 준비 기간이기도 했다. 지인의 소개로 초방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머물게 된 곳에서 여러 유형의 그림책 독자와 작가, 출판사, 그림책과 함께하는 많은 사람을 보고 지나쳤다. 큰 관객 몰이 감독으로 알려진 영화감독이 아들과 함께 그림책을 보고 각각 자신들이 고른 그림책을 한 권씩 사간 게 기억난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번화한 곳이 아니어서 틈틈이, 한편으로 감정을 삭이는 수단으로 에세이도 써나갔다.


고정순작가.jpg ⓒ김지원


그즈음 그림책작가가 되기 위한 코스 또는 도제식 아카데미가 여러 곳에서 싹트고 있었다. 또 한창 열풍처럼 불어 닥친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참관의 열띤 분위기도 2000년 전후부터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먼 산 바라보듯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 곳에 등록해 작가 과정에 합류하게 되면 꽤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갈뿐더러 생활도 해야 했다. 해외 도서전 참관 역시 그저 여유 있는 사람들의 여행일 뿐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모든 것들이 단지 필수도 선택도 아닌 바람일 뿐이었다.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 거쳐야 하는 관문이 아니었음에도 사람들은 들떠있었다. 그는 듣고 보는 화려함에 대해 감내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링 위에서 서서히 지쳐갈 즈음에 아주 천천히 그리고 무척 더디게 그의 작업들은 하나씩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놀라울 만큼 지난해와 올해 2년 동안 무려 다섯 종을 출간해냈다. 그런데 재료와 작업 방식이 각기 다를 뿐 아니라 고민하는 방향도 완전히 달랐다. 한마디로 그는 그림책이라는 장르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중이다. 어떤 경우에는 계약까지 해놓고 출간이 취소되는 일까지 있었는데,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어른들의 규칙에서 약간 벗어났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최근 출간 작품들을 눈여겨보면 이 규칙들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드를 올리고』뿐만 아니라 『아빠의 술친구』와 『철사 코끼리』는 사실 어린아이에게 좀 난해한 그림책이다. 그런데도 출판사와 작가가 만들어냈다는 건 이 정도의 작품이 독자들을 충분히 만날 수 있고, 독자층도 형성되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판단은 옳다. 더 나아가 그림책을 내는 독립출판사까지 만들어버렸다. 달극장 출판사는 2019년에 출발했고 발행인 고정순 작가는 온갖 잔일거리에도 불구하고 첫 책 『박쥐는 왜?』를 탄생시켰다.


아주 어린 시절 기억 속 아버지는 늘 추운 겨울에 솜바지를 입고 도매시장을 다녔다. 그런 아버지가 언젠가 종이컵 커피믹스를 식사 후에 건네주셨다. 이것이 가장 큰 격려이자 응원임을 작가는 알고 있다.


정병규_어린이책예술센터 대표, 『우리 그림책 작가를 만나다』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19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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