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주목하는 한국 그림책
2020년 3월 31일, 스톡홀름에서 낭보가 전해졌다. 백희나 작가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 수상 소식에 ‘너무 드라마틱해서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은’ 기분을 느낀 건 비단 작가만이 아닐 게다. 따뜻하고 유쾌한 상상력, 반입체기법이 주는 사실적이고 해학적인 분위기, 민담과 신화를 차용한 모험적 사고 등을 보여줘 왔던 백희나 작가의 작품을 두고 린드그렌상 심사위원들은 “감각적이고, 현기증이 날 만큼 아찔하며, 경이로운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고 평했다.
아동·청소년문학 분야 종사자들을 격려하고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한 린드그렌상은 아동·청소년 문학계의 노벨상이라고도 불린다. 『말괄량이 삐삐』로 잘 알려진 스웨덴 대표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정신을 기리고자 지난 2002년 스웨덴 정부가 제정했다. 노벨문학상에 이어 문학상으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액수의 상금을 부상으로 수여한다. 물론 상금의 액수가 그 상의 가치를 결정짓는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돈 6억 원에 달하는 상금은 린드그렌상의 의의를 잘 보여준다. 매년 국적에 상관없이 후보에 오른 아동·청소년문학 작가들의 전체적인 작품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데, 올해는 67개국에서 240명의 후보가 올랐다. 후보자 리스트 자체가 전 세계 아동·청소년문학계의 현주소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동시대적 작품성을 지닌 작가들을 대상으로 심사가 이루어진다.
백희나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주제는 위로와 응원이다. 작가 특유의 위로와 응원이 만들어내는 경이로운 싱커페이션(음악 용어로, 한 마디 안에서 센박과 여린박의 규칙성이 뒤바뀌는 현상)의 여운은 완급 조절에 대한 작가의 빼어난 인식을 보여준다.
백희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구름과 연기의 모티프(『구름빵』 『이상한 엄마』 『이상한 손님』)는 분명 눈에 보이지만 잡을 수는 없는, 그러나 구체적인 무게로 가슴 위로 내려앉는 위로를 전한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비상’의 이미지 역시 중요하게 나타나는데(『구름빵』 『이상한 손님』), 이들이 보통의 판타지 그림책 속 비상의 장면에서 그러한 것처럼 높이 날아오르지 않고, 낮고 천천히 날아다니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에 관심을 두면서 보살피는 방식의 위로는 ‘노란 안개’처럼 은근하게 우리를 감싼다.
백희나의 그림책에서는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육체적으로 힘든 상황이 종종 연출되는데(『이상한 엄마』 『꿈에서 맛본 똥파리』 『북풍을 찾아간 소년』), 사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힘이 되는 건 약이나 치료가 아닌 그저 누군가 그 어려움을 함께해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모두가 똑같이 힘든 시절을 겪고 있다는 동질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의 어려움을 잊지 않고 있다는 연대감은 무엇보다 큰 힘이 된다. 서로에게 기대어서 견뎌낼 수 있도록 하는, 변함없이 이어지는 ‘함께’라는 믿음. 그렇게 백희나의 작품들은 믿고, 지켜보고, 지지하고, 품어주는 존재(『삐약이 엄마』)가 전해주는 위로의 힘을 말한다.
반면 위로와 격려에서 한 발 더 나아간 백희나식 응원은 ‘꿈에서 맛본 똥파리’의 맛처럼, 아주 감각적으로 이루어진다. 응원의 실질적인 매개체는 대부분 음식으로 나타나는데, 인간이 행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먹는다는 행위를 통해 자연스러운 현실 탈출의 판타지가 형성되는 과정은 무척 흥미롭다. 빵(『구름빵』), 사탕(『사탕』), 오트밀(『북풍을 찾아간 소년』), 샤베트(『달 샤베트』), 요구르트(『장수탕 선녀님』), 팥죽(『팥죽 할멈과 호랑이』) 등 우리에게 응원을 건네는 음식 이미지들을 보고 있노라면, 괜스레 가슴께가 지잉 하며 목울대가 짜르르해진다.
『이상한 엄마』에는 여러 가지 달걀 요리법이 나온다. 달걀국, 프라이, 오므라이스와 같은 달걀 요리들은 그 자체로 매우 훌륭한 시각적 은유인데, 한쪽 면만 익힌 달걀프라이(서양에서는 ‘써니’ 사이드 업sunny side up이라고 한다)는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바깥과는 달리 따뜻하게 집 안을 비춰주는 태양처럼 보인다. 엄청난 오므라이스를 덮은 달걀옷은 또 어떤가. 모든 것을 품고 따스하게 데워주는 포근하고 촉촉한 달걀옷을 보니, 냄새와 맛을 못 느끼는 증상이 이 고약한 바이러스 감염의 초기 징후라는 사실이 새삼 가혹하게 느껴진다.
이렇듯 음식을 통해 전해지는 감각적이고 직접적인 응원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주인공을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 만들어준다. 용기 있게 현실과 부딪히거나(『알사탕』), 공감과 연대를 통해 에너지를 발산하는(『장수탕 선녀님』) 주인공들이 우리에게 선사해주는 건 다름 아닌 아찔한 카타르시스다.
옛날이야기(story)와 ‘옛날 사람들’ 이야기(history) 사이에서 슬슬 혼동이 생기기 시작한 여섯 살 둘째가 요즘 들어 부쩍 이렇게 묻는다. “엄마, 할아버지에 할아버지에 할아버지는 누굴까요? 할머니에 할머니에 할머니는 뭘 하고 놀았을까요?”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읊어대는 게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한데, 제 존재의 근거를 나름의 방식으로 추적해보다 아득해하는 모양새가 꽤나 귀엽다.
많은 비평들이 분석하는 것처럼, 백희나의 작품 세계를 요약하는 주 키워드는 ‘가족’이다. 물론 많은 그림책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가족 서사를 다루지만, 백희나 작품 속에서 가족은 단순한 ‘추억과 향수’의 표상이라기보다는 확장 가능하고 유연한 유기체로 등장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백희나식 가족은 다소 즉흥적이고 우연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인데, 가족이라는 것은 ‘계획’을 세워 만들어가고 일궈가는 목표 지향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주어지고 던져진 것을 함께 만들어가는 운명 공동체임을 이야기한다. 『삐약이 엄마』에서 ‘니양이’는 똥인 줄 알고 낳은 병아리가 자신의 품속으로 파고들면서 ‘삐약이 엄마’가 되었고, 『꿈에서 맛본 똥파리』의 큰오빠 개구리는 그저 “다른 올챙이들보다 조금 일찍 알에서 깨어”났기 때문에 큰오빠 개구리가 되었다. 집으로 불쑥 『이상한 엄마』가 찾아온 것 역시 “흰 구름에 먹이 쏟아져 버렸”기 때문이고, 어느 날 오후 부엌에 나타난 웬 『이상한 손님』은 나더러 ‘형아’라고 부르며 치댄다.
이렇듯 가족의 개념을 우연적이고 운명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백희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가족의 확장과 변용을 가능케 하는데, 이렇게 확장된 가족 공동체는 마을과 이웃의 모습으로 진화한다. 『어제저녁』이나 『달 샤베트』가 직접적으로 다루는 이웃 간 소통이나, 『장수탕 선녀님』 『이상한 엄마』에 등장하는 세대 간 소통의 이슈는 『알사탕』에서처럼 반려동물은 물론 집안의 가구 등 주변의 모든 것과 마음을 주고받는 물활론(모든 물질은 생명이나 혼,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자연관)의 세상으로 연결된다.
사람을 집적 만나지 않고 물품을 구매하는 언택트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하면서, 접점에 대한 담론이 대두되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점, 사람과 사물 사이의 접점 등 여러 가지 접점들을 어떤 방식으로, 어떤 방향으로 연결하느냐가 앞으로의 우리 삶을 결정지을 것이다. 생각보다 접점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서로 비슷한 관계에서 생기는 접점이 있는가 하면, 전혀 닮은 구석이 없는데도 접점은 생기기 마련이다. 작가의 최신작 『나는 개다』는 다양한 관계에서 산발적으로 만들어지는 접점들을 잘 보여준다. 생김새가 제각각인 동네 개들이 “거의 다 형제자매일지도 모를” 일이며, 다섯 살배기 ‘사람 아이’ 동동이와 구슬이가 ‘멸치깡’을 나눠먹고 베란다에 함께 누워 마음을 나눈다.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우리의 마음과 몸을 움직이는 이러한 관계는 이토록 본능적이고 원초적이다.
백희나 세계 속 등장인물들의 관계는 끊임없이 부딪히고 전복되며 확장한다. 가족은 결코 완전하고 평안한 상태로 유지되는 이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 초기작인 『구름빵』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4인 가족 모델’에 대해서는 작가 자신도 꾸준히 반성적으로 되짚은 바 있다 - 갈등을 겪으며 (『알사탕』 속 아빠와 동동이 사이의 갈등, 『이상한 엄마』 속 호호 엄마의 내적 갈등) 성장하고, 변화하는 유기체다.
가족의 문제와 갈등은 자연스럽게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되는데, 백희나 그림책에서는 환경오염, 도시개발, 일·가정 양립과 같은 시대의 문제들이 완곡하게 제시된다. 『달 샤베트』에 등장하는 과도한 에너지 소비와 환경파괴 이슈나, 『장수탕 선녀님』 속 도시개발의 이슈는 판타지적 장치를 통해 은유적으로 다루어진다. 물론 『알사탕』이나 『나는 개다』 역시 은연중에 ‘옛날 우리 동네’의 미학을 강조하는 작품이다. 그런가 하면 『이상한 엄마』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일·가정 양립과 도시 속 노동의 문제는 『구름빵』과 『알사탕』 속 아빠에게도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작가는 그림책 속 그들의 고민을 우리의 고민으로 치환시키며, 그림책 속 세계와 현실 세계 속 거대 담론 사이의 연결고리를 제시한다.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고 갈라진 관계를 꿰매어, 보다 나은 공동체를 만드는 역할을 하는 존재가 나이든 노인이라는 점도 꽤나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바지런하고 자상한 반장 할머니(『달 샤베트』), ‘알사탕’을 건네는 동네 문방구 할아버지, ‘풍선껌’ 목소리로 동동이에게 가장 필요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할머니(『알사탕』), ‘요구릉’을 드렸더니 감기를 달아나게 해준 선녀 할머니(『장수탕 선녀님』)나 달걀 요리 달인 할머니(『이상한 엄마』) 들은 백희나 월드 속 모험의 주인공인 아이들과 합을 맞추며 마음을 달래주고 문제를 해결한다. 어쩌면 린드그렌상 심사위원들은 백희나의 작품 속에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할머니로 쭈욱 거슬러 올라가는, 그 단순하고 원초적인 관계 속에 지금 우리가 겪는 수많은 문제의 답이 있다는 묵직한 메시지를 읽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족 간의 유대, 공동체 내의 협력, 공동육아, 자연에의 순응 등 아주 오래 전 인류 진화의 원동력이 다시금 절실하게 필요한 시절이다. 스톡홀름발 낭보에 백희나의 그림책을 간만에 다시 펼치니 분홍색 줄이 삐죽 나와 있다. 나와 당신을 이어주는 마법의 ‘분홍줄’이.
박재연_예술사 연구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0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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