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에서 만난 젊은 작가 - 신동준
2004년 한국에서는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날아온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우리나라 그림책 역사에서 세계시장에 진출한 작가들이 많지만 이렇게 규모와 전통이 있는 도서전에서 라가치상 수상작이 나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82년 당시 이원복의 「쥐들의 성대한 치즈파티」가 볼로냐아동도서전에 출품되어 선정되기는 했지만 그때는 그림책이 아닌 한 장면의 일러스트레이션 작품이었다.
신동준 작가의 수상작 『지하철은 달려온다』는 우리나라 그림책이 세계시장에서 주목받는 계기가 되면서 국제 무대 진출의 서막이 되었다. 그로부터 십여 년 뒤인 2015년에 똑같은 공간인 볼로냐아동도서전에서 한국의 그림책이 라가치상 5개 부문에서 입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많은 이들이 신동준 작가와 작품에 큰 관심을 보였다. 세계의 많은 도시에는 지하철과 전철이 많이 있지만 실제로 이 문명의 부산물을 소재로 감정을 넣어 그래픽, 콜라주 방식으로 표현한 작품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지하철 터널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 빛, 바삐 움직이는 이름 모를 사람들이 말없이 움직이는 도시의 풍경을 지금은 사라진 종이 티켓을 의인화하여 감각적으로 옮겨놓았다. 티켓이 캐릭터가 되어 사람처럼 서울고속버스터미널 역에서 출발하여 중간에 5호선으로 환승하고 내리고 지상으로 올라가는 과정을 화면 안에서 움직임으로 보여준다. 획기적인 발상이었고 지금 보면 한 시대의 배경이 들어가는 아날로그 시대의 유산이 고스란히 녹여져 있다. 그동안 한국 사회는 무척 빠른 시간에 디지털 세상이 되어버렸다.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서울에서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누구보다도 이 도시를 좋아한다. 특히 현재 거주하는 동네에서 아주 오랫동안 지내왔기에 더 애착이 간다고 했다. 과거에는 서울의 가장 변두리였지만 지금은 아파트로 둘러싸인 곳에서 사는 일이 어떨까 싶지만 오히려 익명성이 보장되고 더 안정적이라는 작가는 분명 도시에서 사유하는 분위기였다.
특별히 남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자기만의 세계에서 학교를 다녀서 미술부 활동이나 화실 같은 곳을 가지도 않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야 응용미술을 전공해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한 번 실패 후에 전혀 다른 불문학 쪽으로 진로를 바꿔 선택했다. 1980년대 후반의 대학 생활은 황량했다. 1학년 때 군 입대를 해서 돌아온 뒤에는 다시 미술 쪽으로 마음이 가있었다. 이때 우연한 기회에 출판계에서 잡지 등 디자인 일을 하던 사람과 만났다. 그 인연은 어쩌면 운명적인 만남이었는지 모른다. 그 후 그분과 가까이 지내면서 어깨너머로 서서히 출판 쪽의 현장 일을 배우게 되었다. 일을 배우면서 작업실에서 본 『태양으로 날아간 화살』의 일어판 그림책은 무척 신선한 충격이었고 그림책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서서히 마음이 그림책으로 기울어지면서 초방책방이 진행하던 그림책 워크숍에 참여했다. 6개월가량의 워크숍을 끝낸 뒤 그림책 전문 출판사에 들어가 편집자 생활을 하며 점점 그림책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작업에 참견하는 것이 편집자의 입장인데 그 일은 성격에 잘 맞지 않았다. 그때 초방책방의 그림책 작업 제안으로 아예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일반적인 회사에 취직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은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고용관계가 그에게는 불편했을지 모른다. 자신을 경쟁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면에는 일종의 단순한 삶의 철학이 자리 잡고 있음을 감지한다. 최소한의 사회생활로 인한 최소의 소득으로 덜 쓰고 덜 소비하는 사람. 얼핏 수행자의 모습으로 비치지만 실제 그가 살아온 과정과 현재의 생활 방식, 작품에서 보이는 모든 분위기는 거의 일치한다. 성정 자체가 사람들과의 대립 자체를 싫어하며 특별히 주장하고 싶지 않은, 그러다 보니 거절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하기 싫으면 안 하지만 뜻이 맞으면 함께하는 작업에도 참여한다.
열한 명의 작가들이 모여 옛이야기를 모티브로 ‘전래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캉스 그룹은 좀처럼 공동 작업이 힘든 작가들이지만 작업은 개별적으로 작품에 몰입하는 형태이다. 기존 그림책 시장에서 만들어내기 어려운 주제, 새로운 표현 양식들의 실험을 독립출판물로 내었고 그 결과물로 『석수장이 아들』이 오랜 다듬기 끝에 출간되었다.
첫 장을 열면 “석수장이 아들보고 친구가 물었지 너두 이담에 석수장이 되겠네”의 글과 함께 흑백 배경에 두 주먹을 쥔 사진이 나온다. 마지막 장면까지 두 손이 화면 전체를 차지하면서 언어를 대신하며 마치 서로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모양으로 이어진다. 손짓으로 겨루는 입씨름이지만 결국 석수장이를 깔보려 했던 친구에게 이 직업이 대단하다는 것을 무언의 몸짓으로 보여주는 우리 전래동요를 작가만의 방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이 작품뿐만 아니라 『신밧드의 일곱 번의 여행』의 경우 사람들 기억 속에 잠재워져 있는 모험, 낭만적 이미지들을 찾아내 유쾌하게 놀이처럼 엮어내었고, 『물고기와 바람과 피아노』는 오래전부터 물고기, 바람, 피아노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가 이를 그림책으로 형상화했다.
서로 연관성이 전혀 없을 것 같은 개체들이 작가의 오랜 사유 끝에 조화로운 이미지로 탈바꿈한다. 깊은 의미를 별로 두지 않고 하나의 세련된 장식물로 바라보면 오히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그림책이다.
작가는 그런 일종의 놀이를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가볍게 보기를 바라는 그림책을 위해 작가는 깊고 오랜 시간, 내면에서 끌어올리기 위해 수없이 고치고 바꾸기를 거듭하며 한 작품씩 생산한다. 그러다 보니 첫 작업 이후 의외로 적은 작품을 보유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극도로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이 몸에 밴 그와 작품들은 서로 닮아 보인다.
정병규_행복한그림책연구소 소장, 『우리 그림책 작가를 만나다』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1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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