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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탐구하는 작가

작업실에서 만난 젊은 작가 - 조수경

by 행복한독서

작가의 작업실에선 앞쪽으로 문을 열면 북한산이 들어오고 베란다에서 왼쪽을 보면 수락산 능선이 이어진다. 아파트 속에 살지만 그나마 하늘을 바라보는 곳이어서 그는 이 작은 공간을 마음에 들어 한다. 이전에는 장르가 서로 다른 작가들과 함께 있어서 작은 행동에도 조심스러웠다. 두 곳의 공동 작업실을 거치면서 꿈꿔왔던 공간이기에 훨씬 각별한 애정이 깃든 곳. 30년이 훌쩍 넘은 낡고 우중충한 아파트 내부를 순백색 분위기로 완벽하게 바꾼 공사도 모두 혼자서 해냈다. 그림책 이전에 공간을 연출하는 감각이 남다름을 알 수 있다. 실내의 가구와 색채, 소품 배치를 보면서 그의 안목을 짐작한다. 생활에까지 밴 이런 자연스러운 모습을 우리는 배워서가 아닌 타고난 감성이라고 말한다.

조수경사진.jpg ⓒ조수경

아티스트들이 대개 그렇듯 작가도 혼자인 것에 익숙하고 그런 분위기를 좋아한다. 어릴 때 의정부에서 우이동에 있는 초등학교까지 버스 통학을 할 만큼 당찼지만 사실 성격은 무척 내성적이었다. 학교 수업 시간에 “저요, 저요” 하면서 손을 드는 일도 하지 않았다. 질문을 해야 하는 것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내면이 지금 작가의 그림책 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중고등학교 생활 내내 친구들과 어울리는 대신 화실 가는 것을 더 좋아했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림 그리는 일이 그의 일상이었다. 다른 예체능 쪽을 얼마간 배우러 다니기도 했지만 어렵고 싫었다. 이런 길을 모두 이해해준 쪽은 부모님이었다. 좋아하는 쪽으로 가는 길을 그저 지켜봐준 것만으로 감사할 일이다.


도예를 전공하고 사회생활을 하기까지 특별한 굴곡이 없었지만, 오히려 평범한 직장인으로 서서히 지쳐가는 상태가 쌓인 것이 문제였다. 가방 디자인과 관련해 패션 디자인 쪽의 홍보 일은 잘하는 편이었지만 계속 뭔가 비어가는 것 같았다. 마치 남의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처럼. 그를 끌어당기는 흡인력은 다른 곳에서 작용하는 것 같았다. 직장에서 알았던 선배의 권유로 그림책을 강의하는 곳에 발을 디뎠다. 그나마 직장에서의 시간이 긴 편은 아니었다. 비록 회사 생활은 짧았어도 거기에서 얻은 것은 다른 일을 향한 멈추지 않은 열망이었다.


우연처럼 그의 그림책 작업 대부분은 내면의 세계를 각각 다른 주제와 배경으로 다루고 있다. 맨 처음 나온 『내 꼬리』는 어느 날 자고 일어나 보니 느닷없이 생겨난 꼬리 때문에 일어난 일을 스스로 풀어나가는 과정을, 『마음샘』은 늑대 캐릭터를 등장시켜 자신의 정체성 찾기에 나선 심리묘사를 치밀하게 다룬다. 『나』는 한 아이와 한 어른 남자의 이야기가 하나의 책에서 각각 독립된 두 권의 책으로 펼쳐지는 독특한 구성의 그림책이다.


첫 작품 『내 꼬리』 이후 10여 년의 긴 공백기를 거치는 동안 그는 정보 그림책 같은 작업을 하면서 다시 공부할 기회를 준비했다. 자신을 찾기 위한 도착지는 영국의 킹스턴대학이었다. 오직 그림책만을 위한 길과 그 길에서 나를 완성할 수 있을까? 학교에서 일러스트레이션 석사과정 졸업 작품을 제출했는데 이 작품이 『Being』이었다. 여기서 ‘존재’라는 화두가 작가의 사전에서 시작된다. 어쩌면 오랫동안 저장해왔던 씨앗을 싹틔웠는지도 모른다. 졸업 작품에서의 겉표지는 실이 이어지는 모양의 알파벳 Being 모양의 타이포그래피와 도형화한 얼굴의 가면이 은색 실크스크린으로 화면 전체 바탕을 차지하고 있다. 펼치면 가면을 쓴 이들이 나타나고 이들 중에 빨간 끈을 두른 남자가 지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는 이미 흐트러져 있는 가면들이 널브러져 있다. 이미 자신의 진짜 얼굴은 기억나지 않고 얼굴 형태도 지워져 버렸다. 거울을 보다가 자신의 몸에 감겨있던 빨간 끈에 이끌려 어디론가 빨려 들어간다. 한 아이가 이 빨간 끈을 잡아당겨 어른을 숲과 물속으로 이끌며 서로 어울리다가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이다. 손으로 하는 드로잉과 컴퓨터 도구를 함께 사용한 이 작업은 전자책 지원 사업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몇 가지 상을 수상한 점에서도 특별한 주목을 받는다.

처음 시작은 모노톤에서 컬러 화면으로 옮겨지면서 장면이 바뀐다. 이와 함께 이야기의 반전이 이루어지며 확연하게 경계를 구분 짓는다. 모노톤은 자신을 감추고 가면을 쓰는 삶이고, 아이가 끌어당겨 함께 가는 곳은 나의 내면의 ‘아이’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는 가면 쓴 사람들의 얼굴들이 팝업으로 가려져 있다. 그 팝업을 들추면 그들의 실제 얼굴이 드러난다. 이 졸업 작품에는 텍스트가 전혀 없다.


조수경작가 작업실.jpg


2018년 국내에서 출간된 『나』는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여 나온다. 책을 펼치면 양면으로 각각 다른 두 권의 책이 나오고 이 둘을 서로 마주보며 넘길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아이가 등장하는 쪽은 과거의 ‘나’이고 어른이 나오는 쪽은 미래의 ‘나’인데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아쉽게도 두 종류의 다른 책을 현재 만날 순 없다. 두 책을 모두 볼 수 있는 행운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그러면 작가의 세계를 훨씬 더 깊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마음샘』은 무리를 이루며 살아가는 늑대를 독특한 캐릭터로 변모시켜 자신 속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만드는 자기 분석 그림책이다. 나를 찾아가는 심리묘사의 길을 이처럼 명료하게 열몇 쪽의 일러스트로 안내하는 일이 쉬운 일인가?


작가의 ‘나’를 묘사하는 일 못지않게 인간 본질을 탐색하는 것도 이 길의 연장선에 있다. 『곰이 왔어!』는 가상의 시대와 나라, 마을을 배경으로 하지만 탐욕과 이기심, 공존에 대하여 그린다. 이 작품들에서 작가는 우리가 나가야 할 방향과 현재의 우리 삶을 진단하고 치유하는 곤충의 더듬이 역할을 대신 수행해준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를 감싸며 일어나는 많은 일들, 멀리서 내려다보면 아주 작아 보이지 않나요? 지금 우리가 이 지구를 떠난 먼 공간에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좀 달라 보이지 않을까요? 나의 삶과 우리 사회, 공동체가.”


앞으로도 좋아하는 그림책의 세계에서 일을 오랫동안 하고 싶은데 그림책으로 할 수 있는 다른 작업은 없을까. 우리가 함께해야 할 고민을 그가 진지하게 하는 중이다.


정병규_행복한그림책연구소 소장, 『우리 그림책 작가를 만나다』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2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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