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에서 만난 젊은 작가 - 주리
덕수궁에서 열렸던 박수근 화가의 전시회인 ‘봄을 기다리는 나목’은 끝나는 날까지 성황을 이루었다. 아마도 화가의 고집스러운 외길 인생이 훗날 이렇게 많은 사람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의 작업은 그 자체로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보편성이었다.
먼 곳에 가지 않아도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는 그림책은 그럴 수 있을까. 몇 년 전 행사장에서 그림책의 한 장면을 5미터 정도의 시트지로 출력하여 전시장 벽에 접착시키고 있을 때였다. 아직 행사 개막 전이어서 어수선한 분위기였는데 한 관람객이 붙이고 있는 그림을 보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한계령을 위한 연가』 중에서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의 두 장면, 굽이굽이 고갯길에 눈이 오기 시작하더니 온 산이 폭설에 뒤덮이는 그림이었다. 한참 뒤 그분은 이 작가의 그림책을 무척 좋아한다고 했었다. 그때 나는 이 그림책작가가 무척 부러웠다. 애호가들로부터 그토록 사랑받는 그림책과 작가는 행복할 거라는 생각도 했다. 이 작가의 『김용택 시인의 자갈길』도 눈을 시큰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장면들이 있다.
첫 번째는 작가의 감성을 감상하는 사람에게 그대로 전하는 묘사력에 있고 두 번째는 글작가의 작품을 아주 많이 보면서 완전하게 느낌이 오는 작품을 선택한다는 점일 것이다.
작가는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패키지디자인 분야에서 일했지만 잘 맞지 않았다. 뒤이어 전업 작가가 되려고 일러스트를 위한 학교와 다른 교육을 받으러 다니기도 했는데 당시 일러스트레이션을 배우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빠른 시간에 마스터할 수 있는 과정을 원했다. 그런데 예술 분야도 손으로 표현하는 재능 못지않게 소양과 마음 공부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작품에 몰입할 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체감이라고 보았다. 그렇게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꿈꾸면서 한 점 한 점 작업한 그림을 사이트에 올리자 출판사에서 그를 알아보고 표지 일러스트 일을 제안해왔다. 이때부터 수년간 그만의 독보적인 표지 이미지 세계를 구축했다. 그것은 출판 분야에서도 독특한 장르였다.
그는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었다. 우리나라와는 문화가 많이 다른 일본의 출판 환경에서 새로운 일러스트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어 어려운 결정을 했다. 현지에서 어학을 마친 뒤 어느 정도 적응이 될 무렵 본격적인 일을 하기 전에 사진 보정 아르바이트를 먼저 했었다.
그때가 2011년 3월이었다. 한창 일하는 중에 건물 내부가 흔들리면서 천장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일하던 사람들이 지진이라고 소리치며 모두 밖으로 대피하라고 했다. 동일본 대지진을 그렇게 경험했다. 모든 대중교통 수단이 끊긴 채 직장 동료의 집에서 어쩔 수 없이 신세를 졌다. 얼마간 지내다 상황이 수습되면서 서둘러 귀국을 결심했다.
외국 땅에서 생애 최초로 겪은 엄청난 재난이 그를 또 한 번 예상외의 방향으로 이끌었다. 한동안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던 중에 『흑설공주』가 그를 다시 일하게 만들었다. 백설공주를 패러디한 그림 동화로 백설공주가 아기를 낳았는데 까만 피부의 아이였다. 그가 곧 흑설공주였다. 검은 살갗의 공주 얼굴을 절묘하게 표현한 그림은 낯설게 보이지만 이 패러디 이야기를 흥미롭게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흑설공주』를 시작으로 그의 그림책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흰 눈』 『달팽이 학교』 『오누이』 등 작품들은 일관된 흐름을 보여준다. 『한계령을 위한 연가』는 영화처럼 생각하며 작업했다는 얘기가 기억에 남는다. 그림을 보며 영화처럼 상상하고 잠시 판타지 세계로 빠져있다 나오는 이 작품을 아끼는 사람들이 많다. 어른에게도 외롭고 쓸쓸함에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그림이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 그래서 더욱 형식에서 벗어나 마음속 깊이 우러나는 작품을 만들기를 항상 소망한다. 그림에 오랫동안 머물게 만드는, 그로 인하여 가슴에 품고 싶은 그림책으로 남게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 나온 그림책들의 특징이다. 아직까지 좋아하는 연필로 밑 작업을 한 후에 채색만 일부 디지털 도구를 사용하는 수작업 과정은 당분간, 아니 어쩌면 오랫동안 이어질 것 같다. 작가 자신이 즐겁고 좋아서 했던 일은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보는 사람에게도 깊은 울림을 전한다. 누군가 특별히 이끈 것도, 계획한 것도 아니었지만 결국 이렇게 그림책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로 커왔지만 전공으로 공부도 하고 일을 할 수 있기까지는 가족의 절대적인 믿음과 지지가 있어서 가능했다. 태어나서 줄곧 서울 강서 쪽에서 살고 있는 그에게 이 지역은 아주 익숙하고 정겨운 동네이다. 여기에서 부모님께 바칠 그림책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 일이 작가로 살아가는 그가 보답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공개된 장소에서 말은 잘 못하지만 사인 대신 어린이들에게 천천히 그들의 얼굴을 그려준다. 오래 걸리는 그 시간을 모두 기다려준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 안도감과 함께 큰 위안을 얻는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작가로서의 자부심 이전에 독자를 향한 겸손함이 그림의 진정성을 더 돋보이게 한다. 주리 그림책에서 독자를 끌어들이는 또 하나의 마력은 바로 거기서 나오는지 모른다. 그림책으로도 보고 전시장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큰 그림으로 다시 만나는 날이 있기를 기다려본다.
정병규_행복한그림책연구소 소장, 『우리 그림책 작가를 만나다』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2년 4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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