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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반에 내려앉은 화가

작업실에서 만난 젊은 작가 - 조미자

by 행복한독서

강원도 양구군에서 시작하는 북한강과 인제군 가운데를 흐르는 소양강 두 물줄기가 춘천에서 만나 마치 섬처럼 감싸고 있는 곳에 그림책출판사 ‘핑거’가 있다. 실제로 길 너머 강 가운데는 고슴도치섬이 있다. 한적한 길가에 약간 비켜난 듯 낮은 울타리와 대문에서는 집이 환하게 들여다보일 정도로 앞이 트여있다. 차 한 잔 마신 뒤의 여유로움처럼 핑거와 함께하는 조미자 작가의 작업실은 2층에서 밖이 멀리까지 보이는 큰 창이 눈에 들어온다.

네 자매와 함께 자란 춘천은 작가에게 고향 이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으로 여겨진다. 많은 이들이 자란 곳을 떠나 큰 도시에서 상급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줄곧 그곳에 익숙해져서 청소년기 이후의 삶을 타향에서 보낸다. 그런 점에서 작가에게 연어의 회귀는 빠른 편이었다.

ⓒ조미자

그가 대학 졸업을 했을 때 친구가 그림책을 선물했다. 당시만 해도 그림책이 널리 알려진 편은 아니어서 생소했는데 뜻밖에 그림이 특별하게 느껴졌고 외국 작가의 그 책을 지금까지도 소장하면서 무척 좋아한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이 새로운 ‘그림책’이라는 매체가 눈에 들어온 후 자신이 직접 만들어보고 싶었다. 처음에 어떤 형식이나 과정은 잘 몰랐지만 먼저 더미북을 만들어보았다. 그것을 들고 무작정 출판사 간판이 붙어있는 홍대 인근의 어느 곳을 찾아갔다. 참 우연스럽게도 그곳은 그림책과는 거리가 멀지만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진짜 그림책 출판사를 가르쳐주었다.

두 번째로 간 출판사에서 만난 분은 자신들과의 인연 대신 또 다른 출판사의 어린이책 삽화를 소개해주었다. 당시 『별볼일 없는 4학년』에 그림은 이렇게 나왔다. 이 동화책의 번역자가 다른 그림책 출판사를 연결해주면서 『어느 공원의 하루』도 나오게 되었다. 출판사 그림책 공모전에 응모했었던 4컷 분량의 그림이 완성본으로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우연과 인연은 물 흐르듯이 한 작가를 그림책이라는 숲으로 이끌었다. 자연스러운 길이었지만 적극적인 의지가 더 강했기에 일정한 길목에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는 고요함과 단호함이 한데 어울려있는 화가이다. 고등학교 미술실에서 관행으로 내려오는 선후배 간의 이유 없는 폭력 세례에 부당함을 느꼈고 집단을 벗어나 화실로 자리를 옮겼다. 조직이 있는 공동체에서는 선뜻 내리기 어려운 행동이다. 항상 자신이 그리고 말하려는 방향으로 유연하지만 고집스러운 걸음을 해왔다.

조미자-작업실전경.jpg


이십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작업 결과물 중에 단행본 그림책만 스무 편이 훨씬 넘게 쌓였다. 그중에서 일부지만 『가끔씩 나는』 『불안』 『걱정 상자』 『내 방에서 잘 거야!』 『깜깜하지 않은 밤에』 같은 작품에서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속에 일관되게 흐르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이 작품들에서 자란 내면의 세계는 『언제나 하늘』에서 무한하게 열린다. 살면서 나는 얼마나 하늘을 보는가. 작가는 다니면서 메모하고 스케치하듯 소소한 장면들을 저장해두었다가 이 화폭에서 펼쳤다. 같은 하늘이지만 보는 곳마다 다른 하늘을 절묘한 위치에서 잡아낸 풍경들은 사실 우리들이 어디에 있든 볼 수 있었다.

“휘슬러가 안개를 그리기 전까지 런던엔 안개가 없었다”라는 말은 「녹턴:배터시강」을 그린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의 그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 ‘하늘’을 보고서야 비로소 나에게도 하늘이 보였다. 춘천 도심지 설렁탕집 건물, 동네 파란색 대문 집, 소양강 노을 풍경, 어느 건물 옥상의 배 모양, 이런 풍경들이 늘 우리들 곁에서 무심코 지나친 하늘이었다는 것이 새삼 놀라울 뿐이다. 마음을 다스리고 어루만져주는 그의 그림책 『불안』에서처럼 내몰아내려 하지 않고 내 안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마주할 때, 보이는 것은 확 트인 하늘이었다. 많은 이들이 아끼는 책 『불안』은 출간을 위해 출판사 핑거를 만들만큼 작가의 모든 작품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이 그림책 이후 단행본 이외의 작업을 거절할 만큼 그의 길은 확고하다.


일상에서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예사롭게 보지 않는 작가의 시선『타이어 월드』에도 묘사된다. 만들어지고 폐기될 때까지 숱하게 많은 길을 오가며 닳고 닳은 뒤 마지막 도착한 안식처가 ‘타이어 월드’이다. 평생 가족의 울타리로 남아 계셨던 분, 몸이 아프신 아버지를 뵈러 오가는 길에 무심히 지나쳤던 타이어 월드가 세상을 떠나신 뒤 다시 눈에 들어왔었다. 사람과 사물이 평생 쓰임새를 다하고 어느 곳에 묻히거나 쌓여있음을 비로소 경험한다. 모나지 않고 둥굴둥글해서 사람이 원하는 대로 굴러다니기만 했던 타이어는 제 소명을 다하고 잠들어있다. 거기에 해와 달이 뜨고 지며 함께한다. 마치 해와 달이 된 것처럼.

사람과 사물의 경계를 모르듯 늘 새로운 각도에서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었던 화가의 시선은 우리에게 좌표와 경고를 동시에 던진다.


마음의 평정과 헛된 욕망을 떨쳐버리는 길, 그리고 언젠가 도달하게 되는 마지막 여정까지를 그의 그림책들 속에서 발견한다. 『언제나 하늘』을 보면 내가 하루하루 견디며 살아가는 일들이 별것이 아닌 것처럼 속삭여준다.

이제 평온하고 호반의 물결처럼 잔잔한 이 도시 끄트머리에 작가와 핑거가 자리 잡은 이유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나오는 마법과 같은 선과 색채는 바로 여기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음을.


정병규_행복한그림책연구소 소장, 『우리 그림책 작가를 만나다』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2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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